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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독일에서 만난 지름신과 알콜신

하이델 베르크를 둘러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16세기 오래된 고성'이 있는 구시가지 아래로 길게 뻗은 하우프트 거리를 왕복으로 네댓 번 반복해 둘러보는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여행자들에겐 능률이 떨어지고 속 빈 여행 방법이라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나처럼 별것 없는 독일의 작은 도시에서 근 일주일의 시간을 너그럽게 할애할 의향이 있는 여행자라면 꼭 한 번은 해보길 바라는 여행 기법이다. 


요약해 말하자면.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는 '느긋히 머무는 자' 로서의 여행을 해보라 권유하고픈 것이다.


대여섯 시간만 다리품을 팔면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소박한 도시일지라도 길게 두고 머물다 보면 남들은 보지 못한 매력을 찾을 수 있기 오늘도 우린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오래 머무는 사람이 되어 하이델베르크의 진짜 모습을 기 위해 하우프트 거리를 향해 나간다.


'하이델 베르크 성'을 뒤로하고 코튼 마르크트 광장을 지나 길을 내려오다 보면 성령 교회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진 마르크트 광장을 만나게 된다. 


광장엔 이른 아침부터 점심 나절까지 작지만 활기찬 노천시장이 열리는데 정확히 언제, 어떻게 열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엔 오전 7시부터 오후 12시 전까지 시장이 열리는 것은 분명했다. (시장은 12시를 기점으로 문을 닫고 그 자리엔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자리 잡는다)


직접 재배했다는 과일부터 농산물, 치즈와 빵, 각종 잼과 꿀이 한눈에 봐도 싱싱함을 흘리며 모두의 발걸음을 끄는 곳. 마치 '누구 엄마, 이거 방금 따온 호박이야 가져가서 저녁 찬거리로 써.'라고 말하듯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장을 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그들의 삶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베를린이나 뮌헨 같은 대도시로 여행을 갔다면 절대 볼 수 없을 진짜 독일의 삶을 며칠 만에 경험하게 되다니, 이는 분명 하이델 베르크라서, 오래 머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임이 분명했.


한적한 하우프트 거리 한편엔 적당한 관광객과 현지인이 모여 활기를 만들어냈다. 6월 한낮의 하이델 베르크는 다정하고 친절했다. 적당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번잡하지 않은 거리가 평화롭기까지 하다.


길을 걷다 보니 길가에 말린 라벤더 꽃 뭉치 다발을 늘여놓고 파는 자수 가게가 보였다. 직접 기른 라벤더를 정성스레 말려 직접 놓은 자수가 새겨진 흰 면포에 담아 파는 가게.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꽃향기가 코끝을 맴도는 집. 그 옆으로는 수제 초콜릿과 디저트를 파는 가게가 문을 활짝 열고 달달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달콤한 초콜릿 향기와 진한 라벤더 향기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한참을 몽롱한 향기에 취해 있을 때였다. 초콜릿, 라벤더 향기의 꼬리를 물고 익숙하고 편안한 향기, 온몸이 짜릿해지는 매끈한 향기가 흐릿하게 풍겨왔다. 뭐였더라? 어디서 맡아봤더라? 곧이어 익숙한 이 향기는 주변의 어느 향기보다 더욱 진하고 매혹적으로 코끝을 돌아 내 몸을 단단히 묶어 버렸다.


그래. 기억났다. 향기의 정체가 분명해지자 거친 모래사막에 펼쳐진 신기루처럼 눈앞에 드러난 반드르르한 백화점그래! 맞다. 이 향기는 도시에 살며 익숙히 맡아본 자본주의 향기였다.


귀신에 홀린 것일까? 향기에 취한 것일까?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백화점 안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백화점에 들어서자 눈에 들어온 새빨간 글씨 '최고 70% 세일' 문구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피를 향해 달려가는 흡혈귀처럼 정신을 잃은 채 붉은 글씨를 향해 달려갔다. 이성을 잃어도 충분히 용서가 될 만큼의 파격적인 가격표가 눈에 들자 난 사뿐히 이성을 포기해버렸다.


이성을 포기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름신이 내게 강림했다.

지름신의 바람에 맞춰 백화점 로비를 지났다. 눈앞에 하리보 (독일의 유명 젤리)로 만든 귀여운 요정 마을이 보였다.


작은 곰돌이 젤리로 만든 축구장도 있고, 젤리가 된 스머프들이 오색빛깔 젤리 마을을 탐험하고 있었다. 내내 잡고 있던 내 손을 스르륵 빼 버린 딸아이가 눈에 초점을 잃은 채 하리보 세상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아이의 뒷모습을 좇는 내게 지름신이 속삭인다.


"어서 지갑을 열어~~ 저거다신상이래~ 어서 데려가~어서~"


한국에 가져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하리보를 잔뜩 손에 쥔 아이를 끌고 이번엔 내 차례라며 주방 용품 브랜드를 찾아 백화점 안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다이아몬드의 반짝임 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는 스테인리스 용품들이 사방을 빛내고 있는, 한 눈에도 삐까번쩍 끝내주는 냄비들이 즐비한 주방용품이 들어왔다.


반짝이는 냄비 세트를 빛내는 붉은 숫자는 99.99 유로. 프라이팬 세트에 꼽혀있는 숫자는 59.99유로. 같은 제품임에도 한국에선 50만 원이 훌쩍 넘는 냄비 세트가 이곳에선 단돈 십만 원이 조금 넘는다. 거기에 세금 환급까지 받으면 돈이 더 줄어들 테니 안 살 이유가 없었다. 아니 이건 안사면 바보가 되는 상황이다.


곰솥 포함 냄비 4개 세트에 89유로인 WMF 냄비 세트와 FISSLER 휘슬러 압력 밥솥을 단 돈 69유로에 품에 안고, 신상 쌍둥이 칼 세트를 사는 것도 모자라 묵직하고 단단한 각종 스테인리스 조리도구들을 쓸어 담았다.

할인된 가격이 어마 무시해 한국 백화점 가격과 못해도 최대 30만 원의 차액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지름신 강림한 광신도처럼 이것저것을 담았다. 내가 안 쓸 거면 차액을 남겨 되팔아도 이건 분명 되는 장사였으니 말이다.


그때였다. 한숨만 내 쉴 뿐 멀찌감치서 우리 세 모녀를 바라보던 아빠가 걱정 담긴 목소리로 조용히 한 마디 하신다.


"나 이거 안 들어준다! 니가 다 들고 다녀. 아빤 팔목이 안 좋아~"


아빠의 약 올리는 듯한 말에 기분이 상했다. 차액을 남겨 돈을 벌 수 있는 순간 이기도 했고, 살다 살다 이런 파격 세일 조건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거기에 이 브랜드는 일명 주방계의 루이뷔통이 아니었던가. 신나고 팔짝 뛰는 이 순간에 왜 아빤 찬물을 쏟아붓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뒤돌아선 아빠를 째려보며 서운해하려다 순간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 그렇지. 나. 여행 끝내려면 아직 멀었지. 맞다. 그렇지.'


아빠의 말은 그랬다. 여행 막바지면 몰라도 첫 여행지에서부터 무거운 스테인리스 덩어리들을 이고 여행을 다닐 수는 없는 거라고. 하나 틀린 말 없는 아빠 덕분에 현실 타격을 제대로 맞으니 김이 팍! 새 버렸다. 갑자기 무기력증이 밀려왔다. 품에 끌어안은 냄비가 울고 있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직원이 배송료만 내면 한국까지 직배송도 된다는 말로 날 유혹했지만 아빠의 말이 부적이 되었던 건지 내게 붙은 지름신은 유혹에 반응하지 않았다.


지름신을 떨치고 나니 그제야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탐나는 가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비싼 국제 배송료를 내고 냄비 세트를 살 수는 없었다. 이것저것 사려고 눈여겨본 박스들을 거두어 냈다. 그때였다. 실망한 내 모습이 안돼 보였는지 아빠가 인심 쓰듯 말한다.


"그럼.... 아빠가 딱 하나만 들어줄게. 제일 필요한 거 하나만 골라. "


아빠의 허락에 어린애처럼 신이 난 나는 가성비가 제일 뛰어난 냄비 세트를 고르기 시작했다. 단 하나를 고를 자신이 없어 고민에 빠졌지만 그조차 어찌나 행복하던지.

고민 끝에 wmf사의 89유로 냄비세트가 최종 낙찰되어 내 품에 들어왔다. 한국 백화점에서 팔리는 동일 모델과 30만 원 넘는 차액을 득 보게 생겼으니 한 것도 없는데 금세 부자가 된 것 같아 신이 났다.


제품을 포장받고 백화점 로비를 나서는데 그제야 귀에 들어온 소리. 아빠의 배속에서 밥 달라며 보내는 신호. 꼬르륵!

냄비 세트를 품에 안고 상상했다. 단단하고 질 좋기로 소문난 독일제 스테일레스 곰솥에 끓여먹는 곰국은 얼마나 진하고 맛있을까. 무심하게 쌓아만 놓아도 주방 한편을 반짝여줄 냄비 세트를 상상하며 레스토랑을 찾아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이렇게 멀었던가? 한참을 걸어온 듯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레스토랑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일부는 브레이크 타임에 걸려 식당 문을 닫은 듯싶었고, 식사를 제외한 음료 파는 곳만 눈에 띄었다. 숙소까지 얼마 안돼 보였던 거리가 멀게 느껴지더니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더 나가 냄비를 들은 팔이 끊어질 듯 아파오기까지.


팔에 들려있는 냄비 박스를 내려다봤다. 고작해야 냄비 몇 개가 이렇게 무거웠던가? 분명 백화점을 나설 때는 가뿐히 들고 나왔던 것 같은데 어째서 움직일수록 무게가 더 늘어나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물건의 무게가 아닌 물욕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물욕의 무게를 느끼는 순간 방금 전 30만 원을 번 것 같아 땡잡았다던 그 기분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간절히 바라던 냄비 세트는 간사하게도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바뀌어버렸다. 발걸음이 무거워지니 가볍게 걸어가는 가족들보다 뒷처지는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냄비를 버릴 수도 없는 상황.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내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였다. 머리는 알겠지만 괜스레 억울했다.


"이리 줘봐. 그래도 니가 드는 것보단 아빠가 들고 가는 게 낫지."


"딸아! 세상엔 공짜가 없단다. 이득을 보는 것 같아도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한 게 세상사는 이치야. 그러니까 무턱대고 갖으려 들지 말고 니 상황과 입장을 충분히 고민한 뒤에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만큼의 득만 봐야 사는 게 편한 거야. 알겠냐?"


뒷처진 내게 다가와 손에 들린 냄비를 받아 들며 아빠가 말했다.


아빠에게 냄비 박스를 건네자 빠질 것 같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마치 날아갈 것처럼. 마음도 몸처럼 한결 가벼워지니 그제야 하우프트 거리에 쏟아지는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하우프트 거리 식료품 마트 맞은편, 양조장과 레스토랑을 동시에 운영하는 가게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들고 온 직원에게 맥주를 추천받고 독일식 족발 학센과 소시지 요리를 주문했다.


잠시 뒤 직원의 손에 들려 나오는 맥주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맥주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이 황홀하다. 망설임 없이 벌컥벌컥 반잔을 마신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번엔 아빠다. 알콜신이 아빠에게 강림했다.


연거푸 맥주를 마시며 타는 목을 달랜 아빠의 잔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슬그머니 엄마 맥주잔으로 손을 뻗쳤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유~ 누가 술꾼 아니랄까 봐. 자기 꺼 먹으면 되지, 왜 이 사람 저 사람 맥주를 다 마셔보고 그래요."


엄마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아 든 아빠는 그러든지 말든지 두 번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미 내 몫의 맥주까지 마셔버린 지 오래다. 지름신 보다 강력한 알콜신의 모습이었다.


"무슨 맥주가 맛이 다 다르냐. 그런데 다 맛있네. 여기 맥주 종류가 대체 얼마나 되는 거래??"

평소 같으면 뭘 또 마시려고 하냐며 엄마 말을 거들었을 나였지만, 방금 전 아빠 덕분에 욕망의 무게를 거둘 수 있었으니 나도 아빠를 도와 알콜신을 떨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강력한 알콜신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열 가지가 넘는 종류의 맥주를 일곱 개쯤 주문했을 때가 되어서야, 아빠 얼굴에 취기가 돌 즈음이 되어서야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알아서 사라졌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서둘러 자리를 정리했다.


지름신과 알콜신을 떨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빠의 손에 들린 냄비 박스를 보았다. 내 손은 가벼워졌지만 그만큼 아빠의 손은 무거워졌을 테고, 그런 상황이 마치 내 짐을 아빠에게 떠넘긴 것 같아 미안하고 민망했다.

생각해보니 아빠는 내가 어릴 적부터 내 짐을 덜어주려 노력했었다. 겁 많은 나를 자주 업어 주거나, 무거운 것, 힘든 것엔 손도 못 대게 했었다. 그때도 늘 이렇게 말을 하셨다.


" 너보단 아빠가 힘이 더 세지."


그 말을 환갑을 훌쩍 넘긴 아빠에게, 곧 있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듣게 될 줄이야. 자식 인생의 무게가 가볍도록 짐을 들어주는 일을 지금껏 하고계실 줄이야. 작고 움추러든 아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했던 뒷모습이 달라졌다는 건 그만큼 아빠도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는 뜻이겠지. 감사하다가도 애틋하다가도 왠지 눈물이 나는 지금 거추장 스러워던 물욕의 무게 덕분에 자식을 향한 아빠의 사랑을 깨닫게 되다니 그것 참.



지금도 어김없이 날 아끼고 보듬어주는 아빠가 있어, 그런 아빠와 함께 여행하고 있음이 행복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빠와 여행오길 참 잘했다.


'아빠.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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