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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주문을 외워봐. 아프당께! 아포타케!

"어머나... 얼굴이 왜 이래? 어떻게 해 내 얼굴."


시차 적응도 가볍게 넘기고 (여행 와서까지) 새벽잠 욕심이 없는 부모님 덕분에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쓰고 있던 중이었다.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딴에는 최대한 늦게 일어나겠다는 시위를 하던 중이었는데 이건 또 무슨 상황인지 엄마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다급한 손길이 날 흔들어 깨운다.


늦잠은 포기하고 엄마와 아빠의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심상치 않아 벌떡 일어났다. 거울을 보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과 그런 엄마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큰일이 생겼길래 아침부터 호들갑이실까 싶어 엄마의 등을 돌려 괜찮냐고 물으려는데 어랏?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지만 왠지 우리 엄마 같은 분이 울상이 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돌아선 엄마인 듯 엄마 아닌 엄마 같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짧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악~! 엄마! 얼굴이 왜 그래?"


"히야... 큰일이다. 니 엄마 얼굴 이상해졌어.. 이를 어째야 되냐..."


엄마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부어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피부는 귤껍질처럼 울퉁불퉁했고 모공을 훤히 드러내며 울긋불긋한 혈관을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처럼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당황하긴 나도 마찬가지.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자는 동안 피부가 간지러워 몇 번 긁은 것 외엔 나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생각보다 사태는 심각했다. 자세히 보니 단순히 얼굴 피부만 부어오른 게 아니었다. 심지어 눈두덩이 까지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 올라 있었고 그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자 엄마는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태를 보아하니 알레르기 반응인 것은 확실한데. ' 아... 대체 이유가 뭘까.'


견과류 알러지로 기도가 부어 숨을 쉴 수 없었다는 뉴스를 기억하고 제일 먼저 호흡을 확인했다. 천만다행으로 피부의 열감과 간지러움만 심할 뿐 호흡이나 다른 불편감은 없다고 하신다. 어떤 응급조치를 취해야 할지 몰라 한국에서 비상 상황을 대비해 처방받아온 피부 연고를 바르면 된다고 엄마를 안심시킨 뒤 가방 속 연고를 찾으려는데. ' 왜.... 연고 찾는 손이 벌벌 떨리는 건데.'


항생제 성분이 함유된 연고를 엄마 얼굴에 바른 뒤 피부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30분이 지났음에도 연고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질질 매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오히려 피부에 쓰라린 자극을 주며 고통의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유.... 얘.... 너무 따갑고 이젠 욱신욱신 쑤시기까지 해. 어떻게 좀 해줘 봐"

참을성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일가견 있는 우리 엄마가 견디기 힘들다고 말한다. 엄마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일반인에겐 곱하기 열 배 정도 되는 고통임을 알기에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여행 중 응급상황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해외여행 중 피부 트러블에 대한 정보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고민에 절망을 얹어 시름이 깊어질 무렵 딸아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엄마! 할머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어제 할머니가 싫다고 했는데 엄마가 억지로 발라준 화장품 말이야. 그 화장품 상한 거 아니야?"


'뭐라고? 설마. 어제 바른 자외선 차단제? 그 자외선 차단제가 범인이라고?'


다른 날보다 해가 뜨거웠던 어제 피부 보호차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었다. 자외선이 작렬하는 유럽의 여름엔 자외선 차단제를 절친처럼 옆에 두고 덧 발라주는 게 당연했기에 내 딴엔 좋은 뜻으로 엄마에게 권한 거였는데. 피부가 예민한 엄마였지만 한국에서도 유명한 제품이었기에 당연히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놈의 당연히'가 사람을 잡을 줄이야.


내 무지함과 안일함이 엄마를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생각이 들자 죄책감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왔다. 자칫 하다가는 타국 땅에서 엠뷸런스를 타거나, 병원 응급실에 엄마를 데려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법을 찾아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지? 119로 전화를 걸어야 할까? 아! 독일은 응급 전화번호가 911이었던가? 그건 미국인데.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갑자기 귀가 멍해지더니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갑갑해졌다.


머릿속의 이성이 당황한 감성에게 소리쳤다. '생각을 해! 어서 생각을 하라고!'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주눅이 들어 쳐져버린 지 오래. 그래서였을까? 갑작스럽게 전원 공급이 중단된 로보트처럼 생각 회로가 뚝! 끊겨버렸다. 판단에 오류가 생겼고 그 뒤로 감성도, 이성도 더 이상 말을 듣지 않는다. 정신을 놓은 채 멍하니 전화기만 붙들고 서 있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일 뿐이다.


엄마의 얼굴엔 한 시간 전 보다 더 화려한 열꽃이 피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 열꽃은 엄마의 손길 몇 번에 팡!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부 사이로 붉은 피를 흘려댈게 뻔했다.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더 어찌할 바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아빠는 정신줄 놓은 내 얼굴과 처참한 엄마의 얼굴을 무거운 표정으로 번갈아 보셨다. 그리고는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내 손에 들린 전화기를 뺏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49-699567520. '

여행 출발 전부터 고시생처럼 여행지에 대해 공부한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적어둔 비상 연락처는 바로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혹시 모를 응급상황을 대비해 보내준 독일에 있는 대한민국 영사관 전화번호였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오늘이 토요일이라 그랬는지, 운이 나빴던 건지 전화는 연결음만 들릴뿐 누구도 받아주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구급차를 부르거나, 택시를 타고 근처 가까운 병원으로 가는 방법뿐이었다. 서둘러 채비를 하고 호텔 리셉션을 지나는데 엄마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이 (엄마가 괜찮다는 전제하에) 우선 병원보다는 독일의 약국인 APOTAKE (아포 타케)로 가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도 병원에 가는 게 맞지 않냐는 아빠의 말에 엄마가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다며 방향을 틀었다.


"그냥 아프당켄지 아포 타켄지 먼저 가봐. 간지러운 것만 빼면 괜찮아. 아직은 견딜만해."


결국 우린 오늘 있을 관광 일정을 전면 취소하고 평소보다 두 배로 큰 얼굴을 한 엄마를 붙잡고 하우푸트 거리에 있는 '아포타케'를 찾아갔다. 다행히 약국은 호텔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표정이 없는 약사가 무엇을 도와야 할지 물었다. 그런데 왜인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음.... 어..... 아......."


방금 전 집 나간 내 정신줄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말도 생각이 안 나는데 영어 단어가 떠오를 리 없었다. 나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는 뜻 모를 단음만 옹알이하듯 내 뱉은며 웅얼거렸다. 답답했지만 어쩌랴.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는데.


뜸 들이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약사가 엄마의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약사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엄마 얼굴에 고정됐다.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확인한 약사가 엄마를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당황한 엄마는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하다며 내게 도움을 구했지만 그 모습을 바보처럼 멀뚱히 지켜만 볼 뿐 여전히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긴박한 상황을 만든 것도 모자라 능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도움조차 구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그때였다.


"마이 와이프, 스킨 알러지, 베리 식크, 아이 돈트 노 리즌. 헬프 어스"


아빠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약사 언니가 답했다.


"아~피부 알러지인가요? 다른 곳은 불편하지 않구요? "


약사 언니는 언제부터 그랬는지, 어제 먹은 건 뭔지, 특별히 알러지가 있는 음식이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했고, 비록 단어와 단어를 겨우 연결한 대답이긴 했지만 훅 들어온 어퍼컷처럼 빈틈에 정확히 꽂아 넣는 아빠의 멋들어진 영단어 조합 덕분에 약사는 엄마의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해준 알약이 들어있는 작은 박스 하나.

아빠의 문제 해결 능력을 지켜보며 긴장이 풀린 덕분이었을까? 그제야 내 머리는 웅 소리를 내며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평소 고혈압 약을 복용하는 엄마에게 해가 되는 약이 아닌지, 어째서 바르는 연고가 아닌 먹는 약을 주었는지, 기타 부작용이나 문제 될 사항은 없는지에 대해 꼼꼼히 묻고 확인했다. 그녀는 일시적인 피부 알러지는 연고를 바르는 것보다 항알러지 약을 먹는 게 효과가 더 빠르고 처방한 약은 순한 약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럼에도 내가 불안한 표정을 하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라며 자신의 연락처와 근처 병원 응급실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처방된 약을 먹고 얼마나 지났으려나? 천만다행으로 엄마 얼굴이 한 결 편해 보였다. 붉은 꽃이 핀 피부는 진정된 듯 보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어지러운 이상 증세도 없다고 하신다.


나만큼 놀란, 아니 나보다 더 놀랬을 아빠가 고새 몇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초췌해진 얼굴의 아빠가 '이만하길 참말 다행이다' 라며 엄마를 안심시켰다. 위기의 상황에 놓이면 부부애가 폭발하는 게 우리 부모님 특징인가 보다. 평소엔 하루에도 몇 번을 투탁 거리며 싸우기 일수인데 이렇게 애틋하고 금슬 좋은 부부의 모습이라니.


아빠는 낮에 바른 연고를 손에 쥐고 엄마 얼굴을 살포시 잡았다. 아빠의 낯선 친절에 화들짝 놀란 엄마가 무슨 주책을 또 떨고 있냐며 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빠는 쉽게 물러날 수 없다 다짐이라도 한 듯 저돌적 로맨스 파워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아니 이 사람아 가만히 있어봐~ 약 발라주려고 그래.."


"아이고... 내가 바르면 돼요.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고 그래...."


"아니.. 내가 내 부인 걱정돼서 약 발라주는 게 무슨 이상한 행동이라고 그래.."


바르려는 자와 버티려는 자의 실랑이가 길어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내미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을 던진다.


"할머니! 그럴 땐 오빠 고마워요 하고 가만히 있어야지. 할아버지가 할머니보다 오빠니까 오빠 말을 잘 들어야지. 왜 자꾸만 싫다고 그래? 오빠가 동생 걱정돼서 그러는 건데."


당장이라고 끊어질 듯 팽팽했던 긴장이 손녀딸의 엉뚱한 말 한마디에 사르락 풀려버렸다. 기가 막히다며 코웃음을 치던 엄마가 체념한 듯 오빠를 찾았다.


"아이고. 그래~ 내가 우리 손녀딸 때문에 별 희한한 호강을 누린다. 그래요. 오빠! 어디 한번 연고 줌 발라줘 봐요. 얼마나 잘 바르나 한 번 보게."


아빠는 아기 피부 다루듯 신중하게 연고를 발랐다. 연고를 바른 피부로 머리카락 한 올이 내려오자 손끝을 떨어가며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올리고는 엄마 얼굴에 바람을 훅~ 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에도 로맨스라면 기겁을 하는 엄마가 놀란 고양이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펄쩍 뛰며 기겁을 하는 게 아닌가.


"아이고... 이상한 사람이야.. 왜 얼굴에 바람을 불고 그래. 침 다 튀게."


아빠는 드라마에서 처럼 사랑하는 그대의 상처에 호호~ 바람을 불며 달달한 상황을 연출하려 한 것 같은데 현실은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는 모양이다. 아쉬운 듯 고개를 돌리는 아빠의 모습이 짠 하다.


부모님들이 손주를 볼 쯤의 연세가 되면, 당신의 인생살이보다는 다른 식구들(자식, 손주)의 인생살이를 더 중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나는 그런 희생만 가득한 마음,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내 인생은 뒷전에 두고 오직 자식과 손주를 위해 남은 힘을 쏟는 부모님들을 보면 안타깝고 답답했다. 받으면 좋지만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선물처럼 부모님의 사랑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부모님의 희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사랑은 받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두 분이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지내주길 바랬다. 하지만 여느 부모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모님도 사니, 안 사니 싸울지언정 자식에 대한 희생적 사랑은 결코 끊지 못하셨다. 난 그런 두 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노년의 사랑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고 결론지었고 그 공백을 자식의 사랑으로 채워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부모님의 모습을 보니 난 지금까지 착각에 빠져도 단단히 빠져있었다. 그것도 건방짐이 만들어낸 착각으로 말이다. 쉴 새 없이 투닥거리긴 하지만, 아빠와 엄마는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다만 자식을 향한 사랑이 더 컸기에 당신들의 사랑이 작게 보였을 뿐, 한순간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식은 적은 없었던 거다.


그걸 모르고 노년의 부부가 만들어내는 사랑을 가치 없다 생각하다니. 내 어리석음이 참으로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우린 계획했던 프랑크 푸르트 당일 관광도, 하이델 베르크의 몇 안 되는 관광 스팟중 하나인 학생 감옥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숙소에 머물렀다. 하지만 무엇하나 아깝지 않다.

오늘의 관광 스팟은 독일 하이델 베르크가 아니라 부모님의 찐한 사랑이었고. 충분하고도 넘치게 그 사랑을 보고 듣고 경험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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