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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Oct 23. 2021

독일은 화장실 이용료가 대체 얼마라니?

여행에서 필요한 건 용기 그리고 눈치.

노약자 세 분과 함께하는 여덟 시간의 로마 시내 관광은 다행히 무탈하게 마무리되었다. 틈 없는 일정이었던 만큼 혹여 힘들어 지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여행이 주는 에너지 덕분이었을까? 노약자 세 분은 내 걱정과는 다르게 어쩌면 나보다 더 즐겁게 일정을 소화해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23시간 만에 다시 피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해 독일 프랑크 푸르트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다.


드디어 독일에 간다는 ( 한국 식료품이 가득 들어있는 짐을 찾는다는) 기대에 설레는 엄마와, 젤라또 하나로 세상 행복을 다 갖은 딸아이, 로마를 떠나는 게 못내 아쉬운지 공항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발걸음을 느리게 끄는 아빠까지.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첫 도시의 일정을 탈 없이 마무리 짓고 나니 남아있는 일정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레는 건 당연한 거겠지?


비행기에 몸을 싣고 2시간 남짓을 날아 드디어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엄마가 오매불망 보고파했던 수화물은 분실이나 파손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우리 품에 들어왔다. 근 이틀 만에 만나는 김치와 한국 반찬이라니. 짐을 받아 들고 보니 어서 빨리 숙소에 들어가 따끈한 햇반에 컵라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큰 짐을 하나씩 끌고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하이델 베르크로 가기 위해 프랑크 푸르트 공항 청사와 연결된 국내선 기차역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놓은 기차표를 꺼내 시간이 늦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기차가 출발할 플랫폼을 찾고 있는데 아빠가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날 부르는 게 아닌가. 그리고 하시는 말씀.


"여기 화장실이 어딨냐."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주는 맥주를 거절하지 않고 마셨던 아빠였다.(맥주의 나라 독일에 가니 맥주를 마시겠다고 고집한 아빠였다.) 그래. 지금 이 시간이면 방광이 신호를 보내는 게 맞았다.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며 화장실 표식을 찾는 아빠를 보니 급하기가 위험 1단계 같았다. 아빠의 어쩔 줄 몰라하는 몸짓을 본 엄마가 ' 저러다 바지에 지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 그 말에 온 식구가 기겁을 하고 화장실 찾기 미션에 돌입했다. 


다행히 길 건너 복도 끝에서 발견된 화장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경보하듯 걸어가는 아빠의 표정이 해맑다. 그런데 왜지? 헤어진 연인을 만난 듯 반가운 표정으로 화장실을 향해 달려간 아빠가 무엇 때문인지 거사를 치르지 못한 채 화장실 주변을 서성이더니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닌가. (아니, 조금 있으면 지릴 수도 있다면 서요.) 왜 그냥 오시느냐 걱정돼 물으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씩씩 거리며 다짜고짜 하는 말씀.


"돈 내놔봐 돈. "


아니 무슨, 볼일 보러 가신 분이 정작 일도 못 치러 얼굴이 노랗게 뜨기까지 했는데 돈부터 달라는 이유가 궁금해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아니! 어떤 여자가 화장실 문을 막고 못 들어가게 막으니까 동양인 화장실 못 들어가게 인종 차별하는 줄 알았는데 또 그게 아니야! 갑자기 '머니, 머니' 그러면서 돈을 내라고 손을 벌리잖아. 아니~ 뭐 이런 개떡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독일은 선진국이라는데 화장실 가는데도 돈을 내?"


두서없이 뭉뚱그려 던진 아빠의 말처럼 유럽의 화장실은 돈을 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많다. 하루에도 수백수천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니 안전과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고 그렇다 보니 인건비가 발생해 유료로 화장실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런 유료 화장실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관광지 근처나 해당되지 공항이나, 기차역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대부분 무료로 화장실 이용이 가능한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정말 인종 차별이었나?


그때였다. 방광에서 보내는 신호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빠의 말을 들으며 화장실 앞 군기반장 아줌마를 지켜보던 엄마가 말했다.


"저 아줌마 돈 받는 사람 아니야. 봐봐. 다른 사람들도 다 무시하고 그냥 들어갔다가 나오잖아. 혼자 구시렁대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그냥 무시하고 가. 돈 내는데 아닌데 아깝게 왜 돈을 내. "


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요의만 느끼고 있는 아빠에게 엄마 말이 들릴 턱이 없었다. 아빠 성격상 방광님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선 얼마가 되었든 군기반장 아줌마에게 필히 돈을 줘야만 했다. 아빠의 성정을 아는 엄마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아빠 손을 잡고 다시 화장실 앞으로 갔다. 엄마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건 뭐 한 대 맞고 들어온 아들내미 역성들러 가는 모자의 모습이 아닌가.


엄마는 군기반장 아줌마 바로 옆까지 다가가 분위기를 확인하더니 우물쭈물하는 아빠의 등을 떠밀어 화장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엄마를 향해 따지듯 말하는 군기반장 아줌마를 있는 힘껏 째려보더니 고개를 팩! 돌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 왜. 무슨 일이야? 진짜 인종 차별하는 거였어?"


"아니~! 니 아빤 저렇게 사람 볼 줄을 모른다니. 저 아줌마 거지야~!! 거지 아줌마가 사람들한테 돈 달라고 하는 걸 무슨 인종 차별이 어쩌고 유료 화장실이 어쩌고 하고 있다니... 내가 진짜!!"


"네에? 거지요?"


"저 아줌마 행색도 그렇고 옆에 잡동사니 담아둔 카트가 있는데 그 안에 냄새나는 옷도 있고 먹다 남은 빵 봉지도 있고 그래. 그런데 그걸 화장실 문 앞에 일부러 놔두고 사람들이 지나가다 건들면 욕하면서 돈 달라고 하는 거였어. 주변 안 보는 니 아빠 안 봐도 뻔하지. 카트를 휙 치고 갔지 뭘~!! 그러니까 거지 아줌마한테 딱 걸린 거야. 돈 달라고 하는 건 알아들어갖고 당황해서 다시 온 거였어. 그래서 그냥 무시하고 들어가라고 했어. "


아이고. 아버지. 독일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이벤트를 만드는 겁니까. 아빠의 이벤트 욕심은 왜 여행 와서도 변함없는 것인가요.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역시 우리 아빠는 사건 만드는데 최고다 싶고 결국 해결하는 건 엄마구나 싶었다. 답답한 나와는 달리 한결 시원하고 여유로운 표정의 아빠가 화장실을 나오는 게 보였다. 거지 아줌마의 정체를 드디어 알게 돼서였을까? 아빠는 군기반장 거지 아줌마를 째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어왔다.


"아이~ 생각할수록 억울하네.  카트로 화장실 입구를 막아놨길래 못 들어가니까 옆으로 밀어둔 건데 그게 그지 아줌마 물건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꿈에 그리던 아빠의 독일이었다. 그런데 도착 첫날부터 거지 아줌마에게 농락당한 사실이 억울했던 아빠는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하는 기차에서도 연신 답답함을 토로했다. 나 역시 아빠가 마주한 독일의 민낯은 결코 아름답게 포장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긴 하다만 막상 아빠의 실망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초조해졌다. 결국 우린 한껏 무거워진 가슴으로 말없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하이델베르크 중앙역에서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까지 도보로 20분, 차로 5~10분 거리. 마음 같아서야 저렴한 트램을 타거나 걸어가 교통비를 아끼고 싶었지만 이미 화장실 사건으로 독일에 실망한 아빠에게 복잡한 대중교통까지 경험하게 할 수 없어 택시를 타고 편히 가기로 했다.


중앙역에서 숙소까지 택시비는 10유로. 널찍한 승합차에 짐을 실어준 기사는 굵직한 얼굴선에 잘 어울리는 미소로 하이델베르크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 사람들 특유의 무뚝뚝하지만 정감 있는 말투로 우리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얼마나 머물 것인지 물었고 특히 삼대가 함께 여행하는 부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택시 기사의 진심 덕분이었을까? 내내 뚱하니 말이 없던 아빠가 띄엄띄엄 그의 질문에 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는 마치 선생님께 이르듯 기차역에서 겪은 거지 아줌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은 기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노숙자 문제는 현 정부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안 이라며 불쾌한 일을 겪은 아빠에게 대신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방금 겪은 노숙자 아줌마의 돈 내놔 사건이 단순 해프닝이 아니라 독일이 풀어내야 할 숙제라는 것을 이해한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독일을 향한 막연한 애정을 거두고 앞으로는 보다 현실적인 시선으로 여행을 하겠노라 다짐 했다.  


잘 정돈된 도로를 지나 언덕을 오르자 저만치에 숙소가 보인다. 짐을 내리고 계산을 하려는데 아빠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 사람 참 좋은 사람 같다~ 팁을 줘야 되는 거 아니냐?"


뜬금없이 튀어나온 팁 얘기에 당황했지만 여기서 아빠의 기분을 어그러 트렸다가는 독일에 머무는 내내 그때 못 준 팁 얘기로 날 들볶을게 뻔해 기분이나 맞춰 드릴 요량으로 택시비에 3유로를 더 얹어 그에게 전했다. 그런데 뭐지? 택시 기사가 고개를 흔들며 괜찮다는 게 아닌가.


어랏? 팁을 마다하는 사람도 있나? 아니면 돈이 부족해서 그런가? 당황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가 웃으며 설명했다. 10유로 안에 이미 팁이 포함되어 있으니 굳이 더 줄 필요도 더 받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의 마음은 전해야 할 것 같아 기사에게 팁을 주려했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낯선 이국의 노인이 전한 마음이 전해진 것일까? 택시 기사는 한 손을 가슴에 대더니 아빠를 향해 고맙다고 말하며 악수를 청했다.


"독일에 실망하지 않고 부디 즐겁고 건강한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팁을 거절한 그의 진짜 뜻을 이해한 아빠는 그의 차가 언덕을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질때까지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언제 독일이 싫다고 했냐는 듯 얼굴을 환히 밝히며 그에 대한, 아니 독일에 대한 칭찬을 '다시' 늘어놓았다.


"역시~!! 독일이 그럼 그렇지~!! 정이 없어 보일지는 모르지만 원칙적으로 그게 옳은 거야~ 독일 사람들은 이래서 정이 간다니까. "

불과 한 시간 반 전만 해도 독일에 실망해 잿빛이던 아빠의 마음은 호떡 뒤집히듯 홀라당 핑크빛으로 뒤집어졌다. 숙소에 오는 내내 아빠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 했었는데 겨우 택시 기사의 말 몇 마디에 풀리는 마음 이라니.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들어 아빠 마음은 꼭 호떡 같다며, 좋았다 싫었다 마음 뒤집는 기술이 예술 이라며 장난 섞인 핀잔을 줬다.


딸내미의 핀잔에 민망했던 것일까? 아니면 미안했던 것일까? 아빠는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채 괜한 창문만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한 참을 아무말 없이 서성이던 아빠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한 마디를 던졌다.


"이번 여행에서는 다른 거 말고 눈치나 좀 키워 가야겠어."


순간 어이없어 웃음이 터진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저녁 준비에 한 창이던 엄마도 아빠의 엉뚱한 발언에 하던 일을 멈추고 웃기부터 했다. 아니, 갑자기 무슨 눈치?


"아이고. 생각 잘하셨네.거지 아줌만지, 돈 달라는건지 눈치만 있으면 빤히 아는 일을 소변까지 참아가며 당했으니 당신도 참. 그런데 육십 평생 없던 눈치를 어떻게 키우실지 모르겠지만 제발 그놈의 눈치 잘 키워서 엉뚱한 행동좀 하지 말고. 에구."


아빠 마음속에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갔다 나온다는 엄마가 아빠 대신 말을 이었다. 아빠의 민망함을 감춰 주려는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나도 핀잔을 거둬 들이기로 하고 아빠의 '눈치 키우기 프로젝트' 를 응원 하기로 했다.


그래. 아빠. 이번 여행에서 아빠가 준비해둬야 할 건, 용기도 열정도 아니라 눈치. 딱 그것만 배우면 탈 없이 여행이 가능할 것 같아. 솔직히 잘 될지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빠 척. 하면 착. 눈치만 잘 키워놓음 엄마한테 사랑받는 것도 문제없을 것 같으니까 아빠! 잘해봐요. 내가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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