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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Aug 29. 2020

화분 받침,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


우여곡절 끝에(남편을 제외한) 엉망진창 여행 멤버가 정해지고 나는 속절없는 우울 가도를 달렸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족들에게 강탈당한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고, 다시없을 기회가 눈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게 몹시 안타까웠다. 반면, 나의 자유를 낚아채간 그분들( 엄마, 아빠, 딸내미), 내 여행길에 불쑥 숟가락을 올린 그분들은 매일이 축제인 듯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보아하니 나만 정신 차리면 되는 분위기. 그래. 마음을 바로잡자.


그동안 내가 우리 엄니 아부지를 과소평가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듯 부모님은 이번 여행에 적극적이고 또 열정적이었다. 나름 유럽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젊은 피인 내가 있음에도 특히 아빠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심지어 당신이 얻은 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여행을 끌고 나가려 했다. 한마디로 내가 리더 자리를 꿰차고 여행을 주도하려 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까인(?) 상태.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우리 어무니 아부지. 거기에 덩달아 덩덕깨비가 된 딸내미까지 합세해 극기 훈련을 방불케 하는 계획에 양념까지 뿌리니 이건 뭐 출발 전부터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온 기분이었다.

누가 그랬나... 노년의 여행은 모두 다 알아서 해주는 패키지여행이 최고라고! 천만의 말씀. 육십 대의 강려크한 열정은 삼십 대의 노련한(?) 여행자도 단방에 쓰러트리기에 충분했고, 여행의 주도권은커녕 단순 짐꾼으로 좌천당한 나는 아무 말 않고 단순 대리업무만 충실히 하기에 이르렀다.


분분한 의견 끝에(당연히 내 의견은 팽 당한채) 각자 원하는 나라를 하나씩 고르고 그에 맞는 도시를 넣어 루트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탈리아 항공을 타고 가는 덕에 얻어걸린 경유 도시 로마, 절대 술(맥주) 때문이 아니라는 격한 변명과 함께 낙찰된 아빠의 선망의 나라 독일- 하이델베르크, 그림 그리는 엄마가 동경한 열정의 나라 스페인- 바르셀로나, 단순히 '에그타르트'가 먹고 싶어 선택된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우리에게 낙찰된 여행지였다. 한눈에 봐도 나라 여기저기를 널뛰듯 다녀야 하는 효율성 없는 루트. 그렇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이곳이 우리의 최종 결정지이다.



여행지가 구체적으로 정해지니 그다음 일정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도시 간 이동수단을 세분화해서 예약하고 숙소를 정한 뒤 방문할 관광지의 입장료와 티켓을 예매한 뒤 교통비와 식비를 최소로 잡아 1차 계산을 완료했다. 그런데 이런.... 혼자 훌쩍 떠나려고 했을 때의 4배가 되는 경비가 들다 보니 그렇다. 비상금 플러스알파를 계산하기도 전에 통장 잔고가 벌써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미 엄마와 함께 붓고 있던 비상용 적금을 여행에 털어 넣은 뒤라 어떻게든 남아있는 예산 내에서 해결을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노약자 세분을 모시고 가는 여행인데 20대의 배낭여행처럼 빈곤하게만 지낼 수는 없는 일. 무조건 아낀다고 되는 게 아니었고, 그렇다고 생돈을 들이부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찬값 아껴가며 모아놓은 비상금을 털어야 하나, 아니면 동생에게 구호 요청을 해 볼까,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이 안 나오는 상태가 계속되자 출발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 여행이 재미없게 느껴졌다. 그렇게 빈곤함이 여행의 사기를 꺾어놓으려는 찰나. 아빠가 난데없이 한 눈에도 무거워 보이는 나무 박스 하나를 들고 오셨다. 그러더니 하시는 말씀.

"이거 여행 경비에 보태라. 이거 한 5년은 모은 거야. 잔돈이랑, 너희들한테 받은 용돈 다 여기다 넣어놨다."


"사실은 네 엄마 칠순 때 같이 크루즈 여행하고 싶어서 모은 건데 지금 쓰는 게 더 맞을 것 같구나. 얼마나 모았는지 모르니.. 한번 열어봐."


아빠는 쑥스러운 듯 뒷 머리를 만지며 거실 구석에서 존재 감 없이 놓여있던 화분 받침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대체 언제부터 오며 가며 보던 화분 받침이 아빠의 비상금 상자가 된 거지? 여기에 돈이 들어 있었다고? 그것도 크루즈 여행이 가능한 금액이?


설마..... 반신반의하며 상자에 길게 나 있는 구멍을 들여다봤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상자 안엔 희고 노란 봉투와 구겨진 오만 원 뭉치, 겹쳐진 만 원권이 수두룩하게 담겨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의심 없이 봐왔던 화분 받침에 이런 반전이 있을 수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박스를 흔들고, 옷걸이를 넣어 상자 깊숙이 들어있는 봉투와 현금뭉치를 잡아 뽑으며 아빠의 비상금 상자를 털었다. 그리고 바닥에 깔린 흰 봉투, 색 바랜 봉투, '아빠 축ㅎ'까지만 보이는 글씨가 번진 구멍 난 봉투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상자에서 탈출시켰다.


" 니 아빠는 진짜 신기하다~ 니들한테 용돈 받으면 얼만지 말도 안 하고 숨기고 보여 주지도 않는다~"


"아니 저 양반은 연금 받는 거 다 가져다 쓰면서 왜 소주값을 나한테 달래?? "


아빠가 엄마에게 '돈 없다고' 손 벌릴 때마다 '저 영감은 노랭이' 라는 엄마의 하소연이, 아빠의 그동안의 행보가, 교통비 2000원도 악착같이 엄마에게 받아쓰는 아빠의 '자린고비 미스터리'가 단박에 풀리는 순간이었다.


다행이었다. 비상금 상자 안엔 스페인에서 샹그리아를 수십 번 시켜 먹어도 충분할 만큼의, 로마에서 피자와 파스타를 질릴 만큼 먹어도 될 정도의, 심지어 이번 여행을 두어 번 더 다녀오기에도 충분한 돈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돈을 계속 보고 있자니 왜 자꾸 짠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걸까.

눈앞의 이 돈이면 이번 여행에서 힘겨움 없이 관광을 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돈을 내가 쓰게 되면 아빠의 '라스트 로맨스'가 될지도 모를 '부인과 단둘이 크루즈 여행'의 기회를 내가 빼앗게 된다. 장장 5년간, 아내와의 행복한 말년의 로맨스를 꿈꾸며 모아놓은 돈이 아닌가. 그 안엔 엄마를 향한 아빠의 사랑(?)도 있을 것이고, 열정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간절함도 있을 것인데 정말 이 돈을 써도 되는 걸까? 이 돈을 썼다가는 내가 아빠의 열망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닐까? 아...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이다.


"아니.. 이거 써도 되긴 하는 거야? 아빠~정말 후회 안 해? 이거 써도 괜찮아?"


내 목소리에 담긴 망설임의 이유를 알아챈 걸까? 엄마가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얘! 이 나이에 니 아빠랑 둘이 뭔 재미로 크루즈를 가니? 내가 비키니를 입을 것도 아니고, 노인네 둘이 비싼 돈 들여 멀뚱멀뚱 서로 얼굴만 보고 뭐 하겠어! 집에서도 실컷 보는 얼굴 크루즈에서 보면 뭐가 달라지니?"


"어차피 여행 가려고 한 거면 손주들 데리고 자식들하고 가야 재미있지~안 그래요?"


"허허~ 이 사람~! 니 엄마 말이 맞다. 우리 손녀딸하고 같이 가야 재미있지~ 니 엄마랑 둘이 무슨 재미가 있겠냐.... 부담 갖지 말고 보태 써라~!"


그리하여 천만 다행히도 빈곤했던 우리의 여행 경비는 아빠의 '황혼의 크루즈 로맨스'를 포기한 덕분에 충당되었다. 아빠의 미스터리 상자 덕분에 여행 계획은 한결 가뿐하게 진행될 수 있었고 한결 넉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지? 텅 비어버린 비상금 상자를 제 위치에 가져다 두는 아빠의 표정이 살짝 쓸쓸해 보이는 건?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에라 모르겠다. 우선 여행은 가고 보는 걸로, 아빠의 로맨스는 모른 척 접어두기로 했다. 야호! 이제 여행 준비 끝!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다.


'아쉬움 없이 최고의 서비스로 모시겠습니다. 기대하세요.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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