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재난대비훈련이 필요하다

막을 수는 없지만, 피해를 줄일 수는 있다

by 구어령

"이러다 화병 걸리겠어."

"사표 집어던지고 그만둬."

"그래서 더 화가 나."




감정을 조절하는 일은 어렵다. 내가 왜 이러나, 이렇게 화 낼 필요가 있나 생각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어두운 감정일수록 더 그렇다. 화나고 슬프고 우울하고 짜증 나는 감정들 말이다. 가뜩이나 주변 상황 때문에 화가 나는데 감정마저 제멋대로이니 이중으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해결을 하려면 주변 상황을 바꿔야 한다. 내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제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쉬울 리 없다. 사표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관점을 바꾸는 일이다. 주변에 반응하는 내 감정을 대하는 관점을 말이다.


감정은 자연재해와 같다.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여름 태풍이 싫다고 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을 수는 없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으니 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난대비훈련'이다. 분노라는 태풍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마음의 매뉴얼을 준비해 놓는 일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점검하고, 피해가 발생하면 빠르게 복구하고, 다시는 같은 피해가 없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머리는 갖고 일하는 거 맞아?" 팀장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직원들 앞에서 소리를 친다.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술 한 잔 밖에는 달랠 방법이 없다. 어떻게 저런 놈이 팀장인가, 나는 왜 저런 놈이 밑에서 일하나, 대체 내 인생은 어떻게 된 건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받아 폭주를 하게 됐고, 결국 핸드폰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덕분에 지각을 하게 되고, 다음날 출근하니 팀장이 또 깐죽거린다. "핸드폰 잊어버렸다며? 잘한다 잘해." 면전에 사표를 집어던지고 싶다. 하지만 대안이 없다. 결국 또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다.

재난대비훈련이란 이런 것이다.


#팀장 분석

우선 팀장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한다. 그는 이 회사 창업 멤버이다. 그래서 회사가 안정된 지금에는 능력이나 실적보다는 과거의 공적으로 버티고 있는 사람이다. 그에 대한 자부심도 높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직원은 하나도 없고, 라테만 찾고, 하는 일은 깐죽대는 게 전부이다. 다만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장님의 전폭적인 신뢰. 회사가 잘 돌아가는 것을 직원들의 노력이 아닌 팀장의 관리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그의 권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팀장은 태풍 그 자체이다. 그 존재를 거부하고 싶다면, 태풍이 부는 곳을 피하는 방법, 다시 말해 사표를 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태풍 안에 있어야 한다면 그를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에게 열심히 인사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동안은 싫지만 억지로 하는 목례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안녕하세요, 팀장님!"이라고 또렷이 말하기로 한다. 인사 잘하는 직원 싫어하는 꼰대는 본 적이 없다. 그 마음을 파고들어 나에 대한 경계를 낮출 수 있다면 불필요한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그러다 내가 마음에 들어 사장님에게 칭찬 섞인 평가를 해준다면 일석이조의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비굴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나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니까. 2초도 안 걸릴 진심 없는 인사 한 번과 평온한 하루를 맞바꾸는, 불공평한 거래의 승자는 내가 되기 때문이다.


#갈굼 분석

다음으로 그가 지적했던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여다본다. 그의 결론은 내 제안서가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을 요약하면, 정말 요약해서 추리면 이렇다. "요점이 분명하지 않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윗사람은 한가하지 않다, 문서도 대학생이 편집한 것 같다, 그동안 뭘 배운 건가, 회사가 놀러 오는 덴가, 맨날 메신저로 노닥거리기나 하고 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나, 밑에 직원들 보기 부끄럽지 않나, 그렇게 대충 할 거면 사표 써라." 지적으로 시작해 존재의 의미까지 파고드는 전형적인 갈굼 클리셰이다.


사실 모든 갈굼의 시작은 제안서 표지였다. 왜 이렇게 촌스럽냐는 물음에 그동안 '늘 쓰던 표지'라는 답변이 그의 신경을 거스른 것이었다. '늘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늘 하던 것'임을 잠시 잊었던 내 잘못이 크다. 몇 년 전 그가 썼던 제안서 몇 개를 찾아본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가 좋아하는 힘차고 진취적인 느낌의 파도를 해치고 나아가는 중세시대 범선 이미지를 배경으로 쓰기로 한다.


#술 분석

이번에는 술이다. 너무 화가 나서 그냥 집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하소연을 하면 할수록 분노는 계속 커져만 갔다. 직장생활 다 그렇다는 친구의 말에도 화가 났다. 잘못된 게 있으면 바꿔야 한다고, 내가 내일 사장님 찾아가서 저 자식이냐 나냐를 선택하라고 하겠다는 허세까지 부렸다.


분노가 술을 부르고, 술이 분노를 부르고, 결국 술이 술을 불렀다. 기분을 풀려고 마시기 시작했는데 돌아온 것은 더 더러워진 기분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술은 늘 그랬다. 마시기 시작할 때의 감정을 그대로 증폭시키기만 하지 바꿔주는 경우는 없었다. 1차에서 끝냈어야 했다. 적당히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끝냈어야 했다. 다음부터 이런 일로 술을 마신다면 무조건 1차에서 끝내겠다고 다짐한다.


#분노 분석

분노 그 자체도 빼놓을 수 없다. 분노는 감정이라 조절이 어렵다. 그렇지만 무엇이 내 분노의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따져볼 수 있다. 이번 경우에는 4가지였다. 첫째는 불합리한 지적에 대한 억울함, 둘째는 깐죽대는 게 전부인 능력 없는 팀장에 대한 반감, 셋째는 고작 이런 회사나 다니고 있는 나에 대한 한심함, 마지막은 직원들 앞에서 당한 망신이다. 이 4가지가 모여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분노가 폭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눠놓고 보니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분노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았다. 내가 한심한 게 아니라 이 회사가 한심한 것이고, 옆에 있던 직원들은 모두 나를 위로해 주었으니까. 그렇지만 앞에 두 가지는 충분히 분노할 만한 했다. 같은 상황이 닥쳐도 분노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그래도 노력은 해보기로 한다. 억울할 일 만들지 말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자, 이 사람은 팀장이 아니라 사장님의 분신이다,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자고 말이다. 그렇게 가능한 한 분노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다.


#핸드폰 분석

마지막으로 핸드폰이다. 이건 명백한 내 잘못이다. 팀장 때문에 술을 마셔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전적으로 택시 타기 전 필름이 끊겨버린 내 실수이고 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 하지만 습관처럼 잘 고쳐지지 않는다. 술이 오른 다 싶으면 가방에 넣어두자, 집에 갈 때는 음악을 듣자, 꼭 자동결제 택시를 부르자, 택시 타기 전에 알람을 맞춰두자 등 여러 가지를 여러 번 다짐했지만 끊겨버린 필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할부도, 보험도 이미 한도를 초과한 상황, 특단의 조치로 이번에는 가장 싸고 성능 떨어지는 핸드폰을 사기로 한다. 그리고 나와 내기를 한다. 일 년 동안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을 것을 사주겠다고. 그렇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다시 닥친 태풍

그리고 얼마 뒤 비슷한 감정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명백한 나의 실수이다. 팀장은 작은 웅덩이 안 미꾸라지처럼 정신없이 날뛰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팀장님~"의 효과가 미처 빛을 보기도 전이다. 하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평온하다. '내 잘못이니 욕먹자, 그래도 억울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네, 그래, 내가 잘못했지.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계속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도 지쳐 끝내겠지. 내가 의미도 없는 당신 욕해서 뭐 하겠어. 지금은 대안이 없어 여기 있다만 조만간 쿨하게 사표를 던져줄게. 오늘은 비도 오는데 1차만 가볍게. 핸드폰은 소중하니까. 힐끔힐끔 훔쳐보고 있는 김대리나 꼬드겨야지. 그리고 다시는 이런 실수 하지 말아야지.' 여전히 시끄러운 팀장의 고함소리를 BGM 삼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감정의 재난대비훈련이란, 결국 감정을 나누어 살펴보고 정리하는 일이다. 나눌 수 있는 만큼 잘게 나누다 보면 이 감정 안에 없어야 할 것들도 보이고 원래보다 과장된 것들도 있었음을 알게 된다. 없애야 할 것들은 없애고, 과장된 것들에는 제 의미를 찾아주면서 다음에 찾아올 감정에 대비해야 한다. 미리 대비하면, 그다음 태풍은 한 결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감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오늘부터라도 감정을 잘게 나누는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지 않으면, 엉킬수록 커지는 실타래처럼, 우리도 같이 엉켜버릴 테니까. 그때는 정말 인생 제대로 꼬인다. 모든 감정을 풀어내고 어제보다 오늘 더 평온해졌을 때, 비로소 엉킨 감정 아래 숨어 있던 즐겁고 싶었던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