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으니까
본격적으로 캠핑을 시작한 지 3년이 됐다. 캠핑을 왜 시작하게 됐느냐 하는 것 가지고도 글 하나가 나올 테니 이건 킵해두고, 요즘 나를 애닳게 하는 솔캠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 싶다. 혹시나... 솔캠은 솔로 캠핑, 그러니까 혼자 하는 캠핑을 뜻한다.
인생 첫 솔캠은 캠핑을 시작한 뒤 3번째 캠핑이었다. 앞선 두 번의 캠핑에서 대충 느낌적인 느낌으로 캠핑이란 뭔지에 대해 분위기를 익혔고, 그 뒤 약 한 달간의 장비 서칭과 세팅을 하고 첫 솔캠에 도전했다. 결과는 아주 아름다웠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신뢰와 사라진 줄 알았던 본성을 되찾는 기회였다.
뭔가 대단히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얘기했는데,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첫 솔캠이라 혼자 얼마나 술을 마실지 몰라 소주 2병과 맥주 피쳐 1개, 그리고 눈 안주가 되어줄 장작 10kg을 준비했다. 모든 세팅을 마치고 장작에 불을 붙이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소비 속도가 빨랐다.
저녁 10시쯤 되었을까, 준비한 모든 것이 떨어져 캠핑장 매점에서 소주 1병과 장작 10kg을 추가로 구매해서 텐트로 돌아왔다. 분명 한 손에는 소주병, 한 손에는 장작을 들고 텐트까지 걸어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필름이 뚝 끊겼다. 아주 깔끔하게 싹둑 잘려나갔다.
새벽 3-4시쯤 야전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골이 오싹했다. 원래 질긴 필름을 가지고 있어 잘 끊어지지 않는데 고작 이 정도 술에 필름이 끊기다니, 혹시나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스스로를 자책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 나란 인간이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제 자리에 있었다. 새로 사 온 장작은 깔끔하게 다 태웠고, 테이블 한쪽에 소주 3병과 피쳐 1개가 나란히 서 있었고, 먹었던 모든 식기가 설거지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몇 마리 될 것 같지 않은 풀벌레들이 울고 있었고, 옆 사이트 텐트에서 얕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고, 비로소 내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아, 죽인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황에 대한 안심이자 나에 대한 경이였다. 가지런히 놓인 그릇들을 보며 나에 대해 다시 한번 신뢰하게 됐고, 한동안 잊고 있던 혼술 본능을 다시 찾게 돼 기뻤다. 가슴속에서 미친듯한 행복감이 밀려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39도 불볕더위에도, 볼이 갈라질 것 같은 칼바람에도 기회만 되면 솔캠을 간다. 그리고 마신다.
첫 혼술은 대학교 자취방에서였다. 맨날 마시는 술인데, 오늘은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 혼자 마시게 된 게 시작이었다. 당시는 술집에 가면 재떨이부터 주던 시절이라 방에서의 흡연도 자연스러웠다. 치킨 한 마리를 시켜 놓고, 소주 2병을 올려놓고, 창문을 살짝 열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담배 한 대 피우면 세상 더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신발장 앞에 걸려있던 거울을 상 앞에 가져다 놓았다. 무슨 이유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거울 속의 나와 같이 짠~ 하는 요상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 같다. 근데 이게 생각보다 재밌었다. 내가 잔을 들면 같이 들고, 내가 마시면 같이 마시고, 내가 웃으면 같이 웃고, 내가 짠~하면 같이 짠 해줬다. 거울이니까 당연한 얘기. 그런데 진짜 재미는 치킨과 소주와 노래와 담배처럼, 거울이 내 혼술의 필수품이라고 느껴질 때 시작됐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가져다 놓은 거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거울 속의 그와 대화가 되기 시작했다. 거울 속 그에게 요즘 골치 아픈 질문을 던지면, 거울 속 그가 고민을 시작하고, 잠시 뒤 거울 속 그와 밖의 내가 자리를 바꿔 앉아 밖의 그가 대답을 하는 식이다. 한 마디로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혼자 북 치고 혼자 장구 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대화가 너무 재밌었다. 내 질문에 내가 답하는데도, 내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나올 때도 있었다. 조미료 좀 섞어 예를 들자면, "그냥 헤어져 버릴까?" "좋은 생각이다, 안 그래도 너 요즘 XX에 마음이 생긴 거 같던데" "미친놈" 이런 식의 대화를 혼자 하고 있는 거다.
장난해? 니가 I라고?
내 MBTI는 I로 시작한다. 한 다섯 번 정도 해봤는데, 할 때마다 똑같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나를 무조건 E라고 생각한다. 내가 I라고 하면 그럴 리 없다고 장난치냐고 한다. 돌이켜보면, 거울을 앞에 둔 이 자아분열적 대화가 어릴 적 그렇게 미친 듯이 소심했던 나를 'E같은 I'로 진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서부터 이 좋은 혼술의 재미를 잊고 살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자취방을 정리하고 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혼술 자리를 만들어 낼 물리적 방법이 사라졌다. 자식이란 녀석이 맨날 문 닫고 혼자 방에서 거울을 보고 낄낄거리며 술을 마신다고 상상해 보면... 그건 그냥 미친 자식이니까. 그래서 혼술은 내 인생에서 사라졌고, 그렇게 또 시간은 콸콸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솔캠은 나에게 다시 그 공간을 가져다주었다. 그때 그 거울은 이제 텐트가 되고, 팩이 되고, 장작이 되었다. 텐션을 살려가며 텐트를 피칭하고, 커다란 망치로 깡~깡~ 바닥에 팩을 박고, 잠자리와 테이블을 세팅하고 나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마실 때, 그때부터 나는 또 혼자 술을 마시며 불질을 하고 밤을 지새울 생각에 설레기 시작한다.
그동안 그렇게 많은 솔캠에서 그렇게 많은 혼술을 하면서 한 번도 쓸쓸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누구는 캠핑 가면 영화도 보고 책도 읽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럴 시간도 없다. 세팅 끝나고 한 잔 두 잔 하다 보면 야속해서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진짜 화가 버럭 날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가버린다. 그래서 요즘은 소주 페트(640ml) 2개, 맥주 피처 1개, 장작 20kg이 기본 세팅이다. 시간이 짧으니 밀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깟 술 한잔, 내가 사주고 말지
안치환 님의 노래 중에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단호박 제목을 가진 노래가 있다. 정호승 님의 시가 원작으로 기억한다. 빡빡한 인생, 그래도 술 한 잔 하고 파이팅 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마음대로는 되는 것은 없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우리 옆에 있을 뿐이다. 그에게 술 한 잔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따지고 보면, 나 아닌 다른 모두와 모든 것은 3인칭 관찰자가 아니던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고, 마시고 싶은 사람이 술 사다 마시면 되는 거다.
가끔은 1박 2일 시간을 내어, 내 손으로 내 집을 짓고, 내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주변을 꾸미고, 내 손으로 내 잔을 가득 채우고 나를 위해 건배를 해보자. 여기 떡~ 하니 나를 위로하고 지지하고 공감해 주는 존재가 버티고 있는데 가끔 좀 실수하고 넘어지고 그러면 어떤가.
얼마 전 여름 솔캠 때, 분명 잘 때는 비 예보가 없어서 타프에 물길을 내지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와장창 무너져 있었다. 이 날도 좀 마셨기에 비 오는 소리, 타프 무너지는 소리를 못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마침 캠핑장에 손님도 나 하나뿐이어서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 장면을 보고 있는데, 짜증이나 화보다는 짜릿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나도 이제 뭔가 산전수전 다 겪은 솔캠러가 되어가는 느낌이랄까. 게임으로 따지면 신나게 얻어맞았지만 아슬아슬한 피통으로 겨우 레벨업을 해낸, 그런 오묘한 짜릿함이었다.
그렇게 나만의 솔캠과 혼술의 콜라보는 경험치를 더해가고 있다. 그럴수록 나만의 혼자 노는 스킬도 늘어나겠지. 다만 여기에 만렙은 존재할 것 같지 않다. 만렙이 되면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건데, 어디 인생이 우리를 그렇게 호락호락 두겠는가. 와서 비우고, 와서 위로하고, 와서 다짐하는 것의 무한 반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공간과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잘 살고 있는 거 아닐까.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놀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