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2월 마지막주에는 몸도 마음도 분주했다.
평일 점심에 회식을 두 번했고, 지원했던 회사에서 온라인 1차 면접을 보았다. 또 다음 주 월요일이 대체공휴일이라 미리 가족여행을 잡아두었기 때문에 퇴근하고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내려왔다. 그사이 운동도 꾸준히 나갔고 따듯해진 날씨에 두꺼운 겨울옷들을 빨아 두었다.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랑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녀왔다.
그리고 어느 날 평일 오후, 회사에서 받아본 HR inside에 마음이 요란하게 요동쳤다.
그곳에는 나를 제외한 팀원들의 승진 소식이 있기 때문이다. 축하하는 마음과 별개로, 나를 대하는 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인정받지 못했으며 스스로가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니까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어떻게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을까? 내가 매달 인건비 정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는데, 이때마다 차이 나는 급여를 보며 이런 감정이 올라오지 않을까? 수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몸의 감각에 속지 않고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일이 아니다.
인사권을 가진 한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는 누가 봐도 불공정했으며, 애초에 근본적으로 회사에서의 평가로 나의 가치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무자비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의 감각, 감정, 숫자, 상황 등등, 이런 것들에 속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멀리 보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 팀은 "팀장님과 아이들"구조로 총 6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팀장님은 타 회사에서 잠깐 인턴으로 일한 뒤 이곳에서 10년 넘게 재직 중이며, 나머지 분들은 모두 이 회사가 첫 직장인 사람들이다. 한 사람이 세뇌와 군림이 가능한 구조에서 짧지만 경력을 가지고 있던 내가 튀어 보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표적이 되었다.
하필이면 2년가량의 짧은 경력은 글로벌 기업에서 이뤄졌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사내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결정 과정이 빠르고 불필요한 과정은 간소화하거나 생략했다. 담당이 아니라도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하는 것은 시기와 간섭보다는 자연스러운 존중이 있었다. 나도 여기가 첫 직장이었고 이렇게 하는가 보다 생각하고 일했는데 그런 문화를 어떻게 이직했다고 한 번에 지워버리겠는가? (나는 비교하는 게 아니다. 문화에는 애초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이 가장 효율적이게 굴러갈 수 있다면 그게 맞는 것이다. 다를 뿐이지, 빠르고 자유롭다고 좋고 느리고 보수적이라고 나쁜 게 아니다.)
나는 군림하는 자의 모든 말과 행동에 혼란스러웠다. 모든 질문은 도전과 주제넘음으로 왜곡되었고, 감사와 친절은 만만하게 보이는 것으로 여겨 금지되었다. 메신저도 금지, 모든 내외부로 보내는 메일은 발송 전에 검토당했다. 그 사이에 말과 행동에서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소름 끼치게 무례했다. 처음 마주한 상황에 나와 상대 모두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찌해도 돌아오는 못된 말과 표정들에 당황해서 회사에서는 긴장감과 불안만 커졌다. 더군다나 그런 취약함을 이용하는 상급자는 견뎌낼 제간이 없다.
세상에 불합리한 일은 널려있기 마련인데 하나하나 신경 쓰면 어떻게 사나, 타인에게 죄를 짓는 일이 아니라면 적당히 넘기고 포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회가 조금이라도 살만하니까. 머리로 그렇게 생각해도 막상 내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마주하니 힘들었다. 그럴 땐 '내가 뭐라고 부정적인 경험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적당히 까이고 힘이 드는 게 인생이니 받아들여야지'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부당함에 불편함을 느끼고 힘이 든다는 것은 내가 올바르게 잘 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어쭙잖은 경력의 초년생인 말랑말랑한 내가 눈엣가시 표적이 되어 고통을 견디며 이곳에서 성장했다. 다행히 옆에는 따듯하게 공감과 위로를 건네는 동료가 있었고 선택을 지지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다. 부당함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고 나 모르게 녹음기를 켜준 선생님들께 너무나 고마웠다. 나는 원래가 복이 많은 사람이다. 덕분에 힘든 상황에서도 내 근본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상황을 이겨내고 헤쳐나가는가, 상황을 보고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선택은 무궁무진하며 언제나 내 안에 존재한다. 인생은 언제나 길게 봐야 한다. 지금의 나로서는 현직장에 최소한의 에너지를 쏟고 이직을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다. 작년에 이직을 준비했던 2곳에서 오퍼제안이 왔지만 가지 않고 여기 남은 건 내 선택이었다. 그러니 이미 예상했던 일에 타격을 받을 이유가 없다. 거대하고 무자비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에 속지 말자.
나는 다행히도 1차에서 온라인 면접에서 합격했고 대면 인터뷰 안내 메일을 받았다. 충실히 준비해서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내가 예약한 풀빌라 숙소에 대해 가족들의 기대가 크다. 언제나 부모님께 좋은 숙소 예약해 주는 일을 꿈꿨는데 드디어 해본다. 서른둘이지만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아서 뿌듯하다.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뒤에는 4월에 이사 갈 집을 알아볼 예정이다.
왜인지 보이지 않아도 무언가가 조금씩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