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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끼리 Sep 14. 2020

가을 산책

자연에 대한 짧은 감사

올해로 스물여섯. 시간이 이렇게나 빠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여름이 지나고 유난히 길었던 장마가 지나가니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돌아왔다.

 

벌써 1년 가까이 코로나가 국경을 넘나들며 돌아다니는 바람에 어수 산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오랫동안 준비했던 계획했던 일들이 틀어지면서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했고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지금 내가 SF소설에나 나올 법한 시대에서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어찌 적응해 나가면서도 황당할 따름이다. 그렇게 지금은 마스크를 낀 사람들의 얼굴이 더 익숙해져 버렸다. 가끔씩 불가피한 상황에서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보게 되면 저 사람이 원래 저렇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 가족이 아니면 얼굴 보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이 슬픈데 웃기기도 하고 답답하면서도 익숙해져서 뭐 이제는 그냥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2020년의 가을이 시작됐다. 소풍도 중간고사도 여행도 없는 가을이다. 잠시 사라진 것들을 생각해보면 쓸쓸하고 허무한 느낌이지만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을 날씨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맑고 깨끗하기만 하다.


나는 전주시 정기권 교통카드를 충전하기 위해 충전 장소로 지정된 한옥마을 매표소를 찾았다.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고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빨리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놈의 가을 날씨가 나를 붙잡았다.



그동안 너무 답답함이 쌓여있어서 그랬는지 날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한옥마을의 뒷길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는 그동안 전주 한옥마을은 너무나 상업적으로 변해서 그 매력을 많이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문을 닫은 가게와 사람의 발길이 많이 줄어 약간 을씨년스러운 골목이 제법 많이 보였다. 그런데도 한옥이 주는 특유한 느낌과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상하게 편안하고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든다.  생각 없이 한옥길을 걷다 보니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왔다. 길에 울려 퍼지는 90년대 노래를 들으면서 참 흥얼거리기 좋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예전에 혼자 걸으며 나만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그 뒷골목에 도착했다. 정말로 인적이 드문 곳이고 한 참을 뒤로 걸어가야 했기 때문에 비밀장소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혼자 걸을 땐 그 길을 찾게 된다.


아무도 없었다.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마스크를 벗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인가? 시원한, 약간은 차가운 바람이 콧구멍을 타고 폐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이라는 생물로 지구에 살아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길에는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이 삭아버린 탓에 시큼한 냄새를 풍겼다. 그동안 코를 찡그리기만 했던 감식초 냄새가 이다지도 기분이 좋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해와 바람과 소리와 향기가 동시에 휘몰아치면서 온 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주저리주저리 짧은 산책을 하며 좋았던 감정을 적어보니 감사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연으로부터 지금 당장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은 것 같다. 항상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지. 오늘은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 햇빛과 시큼한 냄새에 감사를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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