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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18. 2021

이런 말을 이제서야 해

<디디의 우산>, 황정은


요즘엔 친구들과 연락할 때면 글감 던져 달라 우는 소리를 한다. 3주 쯤 되면 쓰는 게 익숙해지겠거니 했는데 뭘 쓸 지 바득바득 고민하는 데에 익숙해졌다. 핀트가 어긋난 채로 굳어진 고민을 어제처럼 오늘도 안고 있다. 오늘은 영화를 하는 친구에게 글감을 달라고 맡겨 놓은 사람처럼 닦달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서늘함에 대하여'였다. 엥, 최저온도도 10도를 웃도는 봄이 왔는데 서늘이라니. 나보고 판타지 소설을 쓰라는 거냐 반문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서늘함을 써보라 했다. 자꾸 그 말이 잘근잘근 씹혀서 그냥 한 번 써 보기로 했다. 봄의 한 가운데에서, 서늘함에 대하여.



어떤 무술인이 2020년을 두고 진실이 드러나고 악함이 처벌 받는 해라 예언 했다고 한다. 그 예언처럼 불꽃 추적단의 끈질긴 취재로 N번방의 주범이 잡혔다. 버닝썬에서 일어난 집단 윤간 및 약물 성폭행이 드러났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권력형 성폭력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난 지금, N번방의 이용자들은 속속들이 실형을 면하고 있고 버닝썬의 주범은 성매매 및 성폭행 혐의가 아니라 다른 죄명으로 벌금형에 그쳤다. 전 서울시장의 가해나 다를 바 없는 자살로 제대로 된 조사 착수도 하지 못 했으며, 전 부산시장은 최근 가거도 신공항 관련 땅투기 의혹을 받고 있다. 진실은 있는데 처벌이 없다.



거리두기가 상식이 된 사회에서, 그 거리 사이에는 혐오가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 해 게이클럽 발 코로나 확산을 계기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들끓었다. 국내 최초 트랜스젠더 군인이었던 변희수 하사는 언론과 군이 죽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피해호소인이라는 괴랄한 호칭이 붙어 통용되고 있다. 얼마전 서울시장후보자초청토론회에서 안철수 후보는 퀴어 특구를 만들어 관광화 하자는 1800년대 인종전시와 다를 바 없는 제안을 언급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 포퓰리즘을 위해 소수자 혐오를 내비친다. 거리가 멀어지니 벽의 그림자가 길어졌다.



서늘함을 얘기하려 하니 죄다 포털 메인에 걸려있는 소식들이다. 우리 사회의 따듯함은 거기에 없다. 어쩌면 따듯함은 책과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걸까. 괴악한 이야기의 소설을 읽으면 보다 더 괴악한 현실이 겹쳐 보인다. 그런 소설의 결말은 늘 밋밋하다. 허무하지도 희망차지도 않고 평범하다. 나는 그런 평범을 살고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은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 하나 있는데 뭐부터 들으시겠어요?" 그러면 사수가 좋은 소식 부터 듣겠다 대답한다. 주인공은 사수가 콘서트 티켓에 당첨 됐다고 알려준다. 사수는 기뻐했고, 주인공은 뒤이어 "나쁜 소식은 선배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 췌장암이랍니다."라고 말한다. 거기에 대고 사수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며 격노하고 주인공은 이렇게 대답한다. "왜요. 췌장암 뉴스가 보고싶은 뉴스는 아니지 않습니까. 보고싶은 뉴스는 콘서트 표 쪽 아닌가요. 그럼 그게 먼저죠.". 세상의 온도는 늘 어느정도 정해진 수준을 오르내리기에 늘 따듯하고도 서늘하다. 그런데 누가 제 발로 서늘함을 찾아가려 하겠는가. 모두가 안락하고 따듯한 쪽으로 먼저 팔을 뻗고 등을 대고 눕는다. 그러면 서늘한 곳은 점점 사람의 온기 마저 잃고 싸늘해져간다. 어떤 것은 썩을 테고, 어떤 것은 사라질 것이다. 뒤늦게 썩거나 사라진 그것이 아주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됐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1년 중 봄이 가장 행복해서, 요즘 내 글의 디폴트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그런데 사회면을 보다 보면 도저히 그 디폴트에서 가지가 뻗어나가질 못 한다. 내가 써야 하는 건 당장의 따듯함이 아니라 만연해진 서늘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수십번을 쓰고 또 지웠다. 그런데 서늘함은 늘 어렵다. 아무렇게나 전달 해도 반가울 콘서트 표 소식과 달리 췌장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보다 정확하고 면밀해야 한다. 반갑지 않은 소식이 그렇다. 그래서 서늘함에 대해 쓰려니 자꾸 둘레를 맴돌고만 있다. 그래도 용기 내야 하지 않을까. 따듯함에 안주해 서늘함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이렇게 한마디씩 안으로 돌다 보면 어떻게든 썩기 전에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마주한 가장 큰 서늘함은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의 해석에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뭐를.

그 얘기.

......내가 뭘 많이 얘기했어?

아 늘 하지. 하지 않아도 하지.

하면 안 되는 얘기야? 너는 그래서 안 하는 거야?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디디의 우산>,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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