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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19. 2021

평생 해주세요, 내 명예 소방관

<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당연한 친절들에 휩싸여 살고 있다. 그런 건 이미 당연해져서 매일 감사하기에도 어쩐지 민망하고, 유난스러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친절은 날로 기념에 한 해 마다 감사를 표하곤 한다. 그 날이 어버이 날이다. 성인이 되기 전에는 어버이날이면 학교에서 노래를 다같이 불렀던 거 같다. 하늘 높은 은혜, 그런 어려운 단어를 이해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불렀다. 그땐 정말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고, 그저 감사하라 배워서 감사했던 거 같다.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만 들어도 안녕히계세요~하고 배꼽인사를 하는 것처럼, 그냥 주입된 감사에 가까웠다. 그걸 절실히 느낀 건 당연함이 당연해지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스무살이 되고 짐을 잔뜩 싸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설레고 좋았던 거 같은데, 가면 갈수록 정말 혈혈단신이구나 싶어졌다. 그걸 처음 느낀 날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던 날 이른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는 버릇이 있다. 그날도 어김없이 물을 찾았는데, 마실 수 없었다. 문만 열고 나가면 씻긴 컵과 정수기가 있는 집이 아니었다. 물을 마시려면 옷을 입고 나가 가까운 편의점에서 사와야 했다. 그때쯤 체감했던 거 같다. 그 이후로는 나를 둘러쌌던 당연한 친절의 정체가 하나씩 드러났다. 하루이틀 청소를 게을리하면 머리카락으로 온 바닥이 너저분해졌다. 나 한 사람의 빨래 양은 생각보다 많았다. 늘 세탁한 옷과 수건이 있다는 건 그만큼의 가사노동을 누군가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경을 쓰고 자서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 한 쪽이 눌려있었다. 가끔은 불을 켠 채로 그냥 잠들기도 했다. 집에 있을 땐 안경은 늘 벗겨져 안경집에 넣어줬고, 불을 꺼줬다. 내가 어떻게 잠들던지 아침에 일어났을 땐 항상 같은 모습이었다.



스무살이나 됐고,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처음엔 그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 같다. 나는 분명히 다 컸고, 내 몸 하나 쯤은 건사할 수 있다고 굳게 다짐했는데 막상 올라오니 경력없는 스무살은 아르바이트로 잘 뽑아주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과생활이 그렇게 많은지, 각종 엠티와 동아리 회비, 단체복으로 넉넉했던 용돈도 이미 다 쓴 지 오래였다. 내일 밥을 먹으려면 전화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했다. 그게 그렇게 싫었다. 내 철없음이 들통나서 싫었고, 자꾸 폐를 끼친단 생각에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하루종일 고민하다가, 결국 늦은 밤에 전화 했다. 용돈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늘 그랬듯 알겠다 답하셨다. 그 당연한 대답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던 터라 사족을 붙였다.



내가 다음 달엔 꼭 알바할게. 이번 달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알바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그리고 꼭 아껴 쓸게. 뭐 이런 말을 횡설수설 늘어났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빠는 내 말이 끝나자 한마디 하셨다. 내가 니 거기 돈 벌라고 보낸 줄 아나. 내는 니 돈 벌라고 서울 보낸 것도 아니고 공부만 하라고 서울 보낸 것도 아니다. 그냥 사람 만나라고, 그러면서 많이 배우라고 보낸 거다. 왜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우리 아빠는 인생에 한번을 내 선택에 반기를 드신 적이 없다. 이거 하겠다 하면 알겠다, 저거 하겠다 하면 알겠다. 늘 그런 사람이었다. 무뚝뚝하신 편이라 애정도 꾸중도 잘 표현하지 않으셨는데 저런 말을 덜컥 들었다. 무슨 감정이었는 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끊고 나서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붙은 대학에 가는 걸 친척 어른들은 모두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여자 애가 혼자 서울 가서 어떡하냐고, 그냥 부산에 있는 게 낫지 않냐고. 편견 섞인 어른들의 말에 나는 자꾸 주눅이 들었다. 그런 말에 별로 반응을 하지 않는 아빠를 보면서는 더 그랬다. 사실 아빠도 내 합격이 별로 기쁘진 않은 게 아닐까 그냥 오롯한 내 욕심인 걸까 기가 죽었다. 그날 저녁에 친척 어른들 다같이 술자리를 하셨다.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였다. 아이들 중엔 나와 내 동갑 사촌이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옆으로 비켜 앉아서 둘만 아는 애들 얘기나 하고 있었다. 그러다 삼촌이 낮에 하신 얘기를 또 하셨다. 걱정 돼서 서울 어떻게 보내냐고. 그 말로부터 수많은 어른들이 내게 걱정인지 혐오인지 편견인지, 뭐 어쨌든 분명히 축하는 아닌 말들을 굳이 굳이 전하셨고 나는 울컥한 마음에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술도 잘 못하는 아빠가 취기가 올라서 큰 소리 치셨다. 우리 딸이 가겠다는 데 왜 다들 그러냐고, 왜들 그렇게 말이 많냐고. 아빠가 그렇게 크게 화낼 수 있는 사람인 걸 그 때 알았다. 다행히 그 이후에는 나에게 모두 별말 안 하셨다. 몇 이모들은 나를 몰래 데려가서 용돈도 쥐어주셨다. 여자라서 못하고 그런 거 없다고, 너 잘 할 거라고. 그제서야 덕담을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생각보다 나약했고, 매일 자퇴를 입에 달고 사는 귀향지망생이 됐다. 그럴 때 즈음 항상 앞서 들은 아빠의 말들이 떠오른다. 내가 뭘 하고 다니는 지 크게 묻진 않으시지만, 내가 따박따박 가져다 주는 내 명함은 늘 지갑에 들고 다니시는 우리 아빠를 생각한다. 그러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해지고, 나는 또 아빠의 친절에 기댄다. 집에 내려 와서 매일 같이 늦잠만 자는 내게 별 말 하지 않으면서 자고 일어나면 머리 맡에 자꾸 달고 예쁜 디저트가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안경은 또 가지런해져 있고, 베고 자던 휴대폰은 멀리 충전기에 꽂혀 있다.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해도, 나는 아빠의 당연한 마음을 잔뜩 선물 받는다. 딱 한 번 했던 잔소리와, 딱 한 번 들었던 큰소리는 그 때 이후로 다시 들을 순 없었다. 대신에 늘 그랬듯,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고 지켜보신다. 정말 산소처럼, 보이지도 않는 지지가 늘 곁에 가득 차 있다. 그러니까 어떤 풍파가 있어도 아빠만 있으면 난 무사히 숨쉬고 살지 않을까. 




산문집을 묶고 나서 내 글에 엄마가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의 이 말들을 쥘 수 있게 해준 엄마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내게 처음 말을 가르쳐준 사람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이 인사를 여기에 적을 수 있어서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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