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비 Mar 23. 2021

기억은 대부분 2인칭이고 가끔 1인칭이야

<항구의 사랑>, 김세희


옛날 얘기나 한 번 해볼까. 내겐 중고등학교를 내리 같이 다닌 시끄러운 친구들이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중학교 2학년 때는, 우린 사뭇 다른 중2병을 앓았다. 걸출한 범법 행위나 비행을 한 건 아니고, 그냥 매일 같이 떠들었다. 교무실에 끌려가 혼나는 건 부지기수였고 수업시간에 쫓겨나기도 했다. 정말 철 없고 유치한 말썽쟁이였다. 우리가 친해진 건 다 아이돌 때문이었다. 여중의 교실 한 켠에는 늘 '오빠들'에 미쳐 있는 무리가 있지 않나. 우리가 그랬다. 피가 들끓던 시절이라 갖은 사건 사고의 선봉장이 되어 오빠들을 지키고 또 응원했다. 그리고 그 땐 줘도 줘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사랑이 있었다.



이렇게 혼자서 옛날 생각을 하자면 정말 떠오르는 건 덕질 뿐이다. 내가 그 때 그 1위를 위해 어떤 노력을 다했는지, 그때 그 브로마이드를 받기 위해 무슨 수를 썼었는지, 이런 식의 내가 아니고서야 알기 힘든 완전한 오프 더 레코드로 나의 청소년기는 기억된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면 그러한 나의 기억과 감상이 파편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다.



친구를 만나면 시기가 얼마나 흘렀든지 간에, 대화 소재는 우리가 처음 친구가 된 그때로 돌아간다. 불특정한 그때를 나 혼자 추억하면서 한마디를 던지면, 때론 공감을 얻고 가끔은 반박하기도 한다. 나에 대한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가령 이런 식으로. '너 그 때 그랬잖아.', '뭐? 내가 그랬다고?', '너 완전 그랬지!', '맞아 너 그랬어~'. 인생이 영화라면 한 장면에 들어있던 모든 친구들도 사실은 카메라인 게 아닐까. 그래서 서로 같은 풍경을 다르고도 비슷한 각도로 찍은 영상을 이리저리 오리고 붙이다 보면 완성 되는 걸 수도 있겠다.



신곡이 정오에 발매 되던 그 시절을 나는 신곡을 듣겠다고 체육 시간에 화장실로 숨어든 나로 기억한다. 그 얘기를 꺼내니 친구들이 화면을 전환시킨다. 거기엔 딱 그 순간에 나를 어떻게든 숨겨주려 서툰 거짓말을 다같이 둘러댔던 친구들이 있다. 두 장면을 연결하면 수상한 낌새가 가득 나는 친구들의 거짓말의 이유도, 수업시간을 30분이나 빼먹었는데도 들키지 않았던 이유도 모두 풀린다. 서로가 서로의 떡밥을 회수해 주는 그런 존재인 듯하다. 임박한 숙제 기한을 맞추기 위해서 서로 숙제를 나눠 하고 베끼던 것처럼, 그때 우린 참 허술했지만 머릿수로 치밀함을 흉내냈다.



어릴 적을 떠올려 보면 상식 선 안의 행동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때를 얘기하자면 자꾸 우리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무모함에 웃는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주구장창 저질렀다. 발목이 삐었던 친구를 내내 업고 다닌 일, 싸우고 나서 화장실에 들어가 우는 데 싸운 애가 바로 옆 칸에 들어와 울었던 일, 그때 중간에 낀 한명은 교실에서 한숨 쉬며 에낙을 부숴먹은 일, 그 에낙 같이 먹겠다고 넋두리를 들어 줬던 일.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와 결과가 별로 들어 맞지 않는다. 그래서 그 시절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기 어렵다. 'A해서 B했어!'가 아니라 'A해서 P했어'니까. 그때는 B부터 O까지 전부 생략하고도 P가 오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나이였다.



왜 그렇게 앞 뒤가 안 맞았나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컸기 때문이겠지. 성향도 자아도 불완전한 나이였는데 이상하리만치 사랑만큼은 무엇보다 완전했었나보다. 그땐 그런 마음의 대상은 친구였고, 마음을 주체하지 못 해 그냥 냅다 다 퍼줬던 것 같다. 재고 따지는 척도가 없을 나이니까. 하루아침에 짧은 인생 중 가장 큰 존재가 생겼으니 관심사도 모두 친구였겠지. 그래서 마음을 가누지 못 해 자꾸 기울고 넘어졌을 거야. 그렇게 넘어지면서 닳은 거겠지 아무래도. 지금은 그때보단 동그래져서 치열하게 부딪히지도 넘어지지도 않으니까 갈수록 예전의 기억이 강렬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린 아직도 수년 전 얘기를 어제처럼 떠들 수 있는 거고.





대학 시절 집에 머무르던 중에 책상 정리를 하다 세연이가 보낸 편지를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아주 길고, 더없이 진지한 편지였다. 세연이랑 내가 이렇게까지 친했던가? 이렇게 친했던 시기가 있었던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조금만 친해도, 또는 친하지 않아도 길고 긴 편지를 주고받곤 했었다.


/<항구의 사랑>, 김세희





작가의 이전글 평생 해주세요, 내 명예 소방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