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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26. 2021

멀미나니까 내려주세요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요즘 나쁜 꿈을 자주 꾼다. 특별히 불행한 것도 아니고, 사실 따지자면 기분이 좋은 축에 속한다. 간만에 친구를 만나는 한 주를 보냈고, 또 언제나 그랬듯 봄은 시작과 설렘의 계절이니까. 그런데 잠만 들면 행복은 간데 없이 사라지고 악몽이 뒤엉킨다. 내용은 늘 엇비슷하다. 앞두고 있는 일이 틀어진다. 오늘은 운전 면허 기능 시험이 있었는데, 늦잠 자서 시험도 못 치르는 꿈을 꿨다. 자고 일어나면 꿈 내용에 대한 기억은 토막나곤 하지만, 늘 이런 류의 꿈은 감정은 완연하다. 그 감정이 도화선을 그려서 어이없는 실수로 시험에 떨어졌다. 그러고 보면 묘하지. 꿈의 일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다만 감정이라는 사실이.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일단은 게을러서 우울해졌다. 타고나길 뭐든 처음부터 잘한 적이 잘 없는데 지금은 뭐든 안 해본 일만 해서 기가 죽는다. 이런게 발전의 과도기인가 싶다가도 그냥 시간 낭비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과도기가 그렇듯, 자기확신이 조금씩 흩어진다. 파도가 높아져 더 가까이 뻗쳐와서 어쩌면 내 모래성이 무너질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할 수 있는게 없다. 이미 만든 모래성을 들어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면 가장 쉬운 건 원망이다. 그러게 왜 여기다 쌓았어, 조금 뒤에 가서 쌓을 걸. 그치만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 걸. 그럼 이제 나의 무지를 탓 할 차례다. 그런데 게으른 것도, 처음은 너무도 서툰 것도 결국엔 그 기준이 나에게 있다. 나는 누구보다는 부지런할 수도 있고, 열심일 수도 있고, 능숙할 수도 있으나 지금 내겐 그런 게 하등 소용이 없다.




오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들뜰 수 없겠다.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눈을 흐린 채로 써내릴거 같다. 여느 에세이의 마무리에 걸맞는 훈훈한 마무리나 교훈이 없을 것 같다. 불안을 애써 감추는 데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다. 늘 성취는 나도 모르는 새에 오고 좌절은 모든 과정을 마디마디 짓이기며 지나간다. 성취는 지도 상에 뜨지 않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경로도 나오지 않고 거리도 시간도 내 위치도 어느 하나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서있는 여기가 반대 방향인 지, 맞게 가는 건지 그런 건 알 수 없다. 그런 점이 참 지독하다. 인생은 마라톤이라지만 그건 비유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같은 코스를 통해 같은 목표점으로 뛰어가지를 않는다. 그런데 자꾸 마라톤으로 비유하고 그걸 관용구처럼 쓰는 세상에 살다보니 그게 사실 같다. 그러니까 자꾸 뭔갈 이뤄내는 사람들이 나보다 부지런해서 추월했다고 여기고, 나는 게을러서 그들을 따라가지 못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괜히 그렇게 된다.




내 하루는 왜 짧을까. 서두르고 싶고 서두르고 있는데, 자꾸 마음만 앞선다. 마음이 앞서는 걸까 몸이 뒤쳐지는 걸까. 그럼 몸에 맞춰서 포기해야 되나. 서두른다는 건 낭비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얘긴데 자꾸 서두르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구가 그만 돌았으면 좋겠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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