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지나도록 편지만 들춰보다가>, 지은 수진
편지를 좋아한다. 쓰는 것도 좋아하고 받는 것도 좋아한다. 누군가의 시공간이 종이 위에 각인되기에 좋아한다. 그래서 편지를 잘 버리지 못 한다. 애초에 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치도 못 했다! 처음에는 또박또박 써내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힘이 풀려 원래 글씨가 표나는 손글씨체도 사랑스럽고, 시간 만큼 변한 편지지도 좋다. 변한 건 담긴 종이 뿐이지 그 안의 마음은 하나 변하지 않는 다는게 좋다. 최근 두 차례나 이사를 했다. 기숙사에서 짐을 뺐고, 부산 본가도 이사했다. 그러면서 꽤 많은 편지를 발견했다.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이걸 주고 받을 땐 망설임 없이 호감을 표하던 친구의 글도 있었고 거의 10년이 다되가는 편지도 봤다. 이 학교의 먹짱이 누군지 가려 보자는 결투장도 있었다. 누가 더 많이 먹나 대결도 하고 살았다.
스물한살 때까지만 해도 아예 100매 짜리 레터패드를 사서 심심할 때마다 편지 써주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안 쓰기 시작했다. 아마 코로나가 창궐하면서 편지를 써도 건네줄 방법이 없어져서 그랬던 게 아닐까. 편지 쓰는 건 늘 좋지만 막상 우체국까지 가기가 귀찮아서 못 보낸 편지들도 꽤 있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편지를 자주 받고, 또 자주 쓰고 있다. 받는 건 얼마 전 생일로 인해서 였고, 쓰는 건 덕질 때문이다. 요즘은 글을 거의 매일 써야만 해서 뭐든지 메모하고 살았던 예전에 비해 일상에서의 쓰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요리사가 집에서는 그냥 대충 떼워 먹는 거랑 비슷한 걸까? 사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지금 역량에서는 품이 많이 들어가는 터라 어찌 됐던 애가 쓰인다. 글쓰기가 애 쓰는 일이 된 이후로 약간 쓰는 일이 질리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아무래도 덕질은 천지를 개벽하고 홍해를 가르는 건지, 마법의 글자 '최애에게'를 쓰면 한장이 뚝딱 나온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침전하는 요즘인데 덕질이 그걸 고루고루 섞어 다시 띄워준다. 그런 일이 생기면 일단 고마워지니까 그리고 고마운 마음은 글로 풀어내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다보니 계속 쓸 수 있겠단 생각도 든다. '고맙다'는 나에게 그런 단어인 것 같다. 앞에 무수한 미사여구와 수식절이 덧붙여져도 넘치지 않는 단어. 육하원칙에 따라서, 언제/어디서/누가/무엇을/어떻게/왜 고마운 지 차례차례 그 과정을 한발 두발 밟아 나가야만 그 뜻이 오롯하게 전해지는 말. 그래서 매일 같이 생경한 고마움을 주는 덕질을 하다보면 자꾸 쓰게 되고 그렇게 쓰인 글을 모아 보면 그 어떤 글보다 몽글거리는 기쁨이 읽힌다.
생각해보면 편지는 답장을 쓰는 일이 드물다. 생일 편지 같은 경우에도 그 다음 발신인의 생일에 쓰면 된다지만, 그건 이전 편지의 답장이 아니라 또 다른 축하 편지에 가깝다. 어딜 가도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돌아온단 기약도 없는 마음을 고이 접어 보낸다는 게 참 순수한 것 같다. 교환이론에 의거하자면 몰가치한 일일 수도 있겠는데, 그런 무용하고 무해한 방식으로 다정과 사랑을 전한다는 게 썩 귀엽지 않나. 차마 말로는 못 전하겠는 마음이 글로 쓰면 갈팡질팡 하다가도 결국 오롯하게 전해지는 그 과정이 귀엽다. 그래서 편지가 좋아. 세상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건 초코파이 뿐인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나 더 있네.
우리가 책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날
2016년 7월 28일이었어.
서로 너무 바빴고 자주 그렇듯이 힘들었어.
이 편지책을 제작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던 사람은 나였고,
가만히 듣고 있던 너는 고개를 끄덕였지.
우리의 유년 시절이 달가웠던가?
나는 좀 아팠는데, 너는 어땠더라?
그건 유심히, 찬찬히, 다시 편지를 읽어볼까 해.
심호흡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야.
숨을 고르고, 편지를 들춰보자.
<사계절이 지나도록 편지만 들춰보다가>, 수진 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