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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5. 2021

23년차 게으름뱅이입니다

<죄인>, 장희원

이사를 하면서 옷 정리를 했다. 헹거에 걸려 있던 두터운 외투는 깊숙이 넣어두고 그 자리에 봄자켓을 여러 개 걸었다.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는 길이로부터 시작된다. 해가 길어지고 외투는 짧아진다. 봄의 흙냄새가 찬바람을 타고 일렁인다. 환절기가 찾아왔다. 세상이 나뭇잎의 채도에 물든 세상이 하루하루 들뜨는 봄이 다시 왔다.


개강과 개학으로 떠들썩한 오늘, SNS는 시작에 대한 소회가 넘실거린다. 담임 선생님이 너무 좋다, 친한 친구와 떨어졌다, 반에 모르는 친구들 밖에 없다, 이런 새로운 환경의 새로운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인생 최대 고민이 반편성이던 때가 그립다가도 생각해보면 그때의 세계는 정말 교실 하나만큼이 다였기에 온 세상이 걸린 고민을 하고 있던 거였다. 좋을 리가 만무한 시작이었다. 사람을 사귀는 데 1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고, 인간관계가 1년마다 변하는 건 너무 어지럽지 않나. 시스템이 묶어 놓은 반에서 어찌됐던 1년을 보내야만 하니까. 이제는 기억이 예쁘게 포장 됐는 지 나의 십대는 대체로 행복하고 자주 웃었던 것 같다. 이런 말을 불행하던 십대의 내가 들으면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내가 지금 어떻게 버티고 있는데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냐며 나무랄 수도 있겠다. 고맙고 사랑해.


그러고보니 그때의 내가 생각했던 어른의 나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한번은 열 여섯 때 내가 나에게 쓴 쪽지를 발견했었다. 그 내용은 대충 눈 앞에 놓인 수학 참고서를 미루고만 있는 지금 당장의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걸 읽은 건 열 여덟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그때도 수학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대뜸 책상정리를 하다 구석에 박혀 있는 넋두리에 가까운 쪽지를 우연히 발견했었다. 그 쪽지가 나름의 충격이었는지 다이어리에 왜 사람이 발전이 없냐며 꾸중을 잔뜩 써 재꼈고 그걸 다시 스무 살 때 발견했다. 아마 서울 살이가 너무 힘겹고 지겨워 수업을 빼먹고 본가로 도망쳤을 때였을 거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관망하고 있는 지금은 4학년을 앞두고 어떻게든 쉬겠다는 마지막 발악으로 휴학을 단행한 스물 세살이다. 사람이 뭐 이렇게까지 한결 같나 싶어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그래도 변한 게 있다면, 나는 이제 내 게으름을 받아드렸다. 몇 년 전만해도 불타오르던 개선 의지가 완전히 꺾인 거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게으름뱅이고 이걸 바꿔 보겠다 채찍질 하는 건 아무 짝에 쓸모도 효과도 없는 자기검열일 뿐이란 걸 알았다. 뭐 어쩌겠나, 이렇게 태어난 걸. 나는 아주 명백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에서 ‘끝까지’가 부족한 사람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겨 먹은 대로 살아야 하나? 맞다! 나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면 죽는다는 미신을 믿는 편이다.


다만 좀 입체적으로 바라보면 된다. ‘끝까지’가 부족하면 시작부터 중간까지 ‘최선’을 있는 힘껏 다하면 된다. 그리고 약발이 떨어질 즈음 다른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 아닌가. 온 몸이 거부하는 걸 마음이 억지로 시킨다고 될 리가 만무하다. 편식을 고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한다. 신체 노화가 진행되면서 미각이 감퇴되고 예전에는 먹지 않던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있다고 한다. 게으름도 편식처럼 시간이 약이다. 2~3년 뒤의 내가 이 생각을 어떻게 받아드릴 지 모르지만, 기왕이면 좀 예쁘게 봐주면 좋겠다. 지금 나의 태평함이 답답하지만 않아도 참 좋을 텐데.


물론, 나의 친구들 중 엄청난 지구력으로 무한의 부지런함을 자랑하는 멋진 사람도 있다. 나였으면 한번 보고 넘어갈 일을 서너번은 더 들여다보는 꼼꼼한 사람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빠르게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내가 나의 게으름에 질리던 때에 이들은 자신의 완벽주의에 지쳤을 수도 있겠다. 살다 보면 잘하려고 하다 넘어질 수도 있고, 완벽하지 않아서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니 말이다. 당장의 내가 기준이나 잣대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할 이유가 없다. 내 천성을 의심하고 혐오하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지 않나. 나는 틀렸으니 나와 다른 너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이 세상이 모두 나와 다르니까 내가 틀린 거라고 오해할 이유도 없다. 나는 내 방식에 맞게 옳은 거고, 너도 그런 거다. 이에 대한 믿음이 후일까지 흔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된다면 나를 그럭저럭 예쁘게 봐 줄 테니까.



세계의 ‘기준’이나 ‘잣대’에 대해서 곱씹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다 쓰고 나서는 이런 마음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기쁨을 느끼는 곳이 옳다.

옳다.

그것은 누구도 뺏을 수 없다.


온 마음을 담아. 부디 모두가 그런 세계에서 지내기를 바란다.


/장희원,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작가노트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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