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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5. 2021

엔딩을 정해두며 여는 시작

<언제나 해피엔딩>, 백수린

 습관,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 대게 그렇듯 습관은 그 사람의 많은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여느 습관이 그렇듯 어떤 건 나도 모르게 들었을 테고 또 어떤 건 나만 아는 채 들었을 테다. 내게도 나만 아는 습관이 하나 있다. 꼭꼭 씹어 먹지 않는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부터 나는 무언갈 먹을 때 제대로 씹지 않고 삼켜버리곤 했다. 그런데 이 습관은 내 입 안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손 거스러미를 뜯는 일처럼 누가 알아보고 말려줄 수 없는 습관이다. 그리고 대게 부지불식간에 일어나서 매 식사마다 내가 잘 씹고 있는지 체크해 줄 수 있는 건 지구에 나 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내가 잘 몰라줬고, 잦은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하루는 도대체 왜 이런 습관이 들었나 싶어 곰곰이 톺아 봤다. 지금 먹고 있는 게 충분히 맛있어도 다음엔 저걸 먹겠다는 욕심. 이것도 저것도 다 먹겠다는 욕심. 그 욕심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먹고 있는 게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삼켜 버리기 일수였다. 욕심으로 꾸역꾸역 먹은 것들은 당연히 내 위장이 받아 주지 못했고, 자주 체했다. 욕심이 과해 마음이 쏠리면 현재에 집중할 수 없어지기 마련이었고, 나는 자연스레 위태로워졌다.


 기억해보면 스물한살 때 늘 체해 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마음이 앞서다 보니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균형을 내가 알아보질 못해서 잔뜩 체했다. 매 순간이 조급했고, 내가 이뤄가고 있는 현재와 이뤄낸 과거를 깎아 내렸다. 나의 어제와 오늘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그러니 내일의 의미라도 얻어내기 위해 쉴 새 없이 뛰어 다녔다. 평생을 써 온 일기도 그 해에는 단 한편도 쓴 적이 없다. 하루를 써 내리기가 무서웠다. 혼자 있으면 내 상태가 어떤 지 자꾸 보일 것 같아 사람을 만나려 애썼다. 모든 게 과했고, 당연히 체했다. 마음이 체하면 눈물이 나는 걸 그때 알았다. 매일 같이 현실 같은 악몽을 꾸고, 악몽 같은 현실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잘 하려고만 하던 그 때, 나는 나에게 잘하질 못했다. 그렇게 악에 받쳤던 한해가 끝나고, 코로나19가 창궐했다.


 모두가 당황하고 우울하던 작년 2월이 내겐 과속방지턱이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매일을 보내며 나를 직시해야 했다. 지난 1년 간 부단히 무너져 온 내가 보였다. 태엽을 다시 감기 위해 매일 하는 일을 만들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요가를 시작했고 기타를 배웠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밤새 일을 하지 않아도, 내 일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완전히 모든 게 락다운이 된 그 달에서야, 그걸 알았다. 상처를 짓무르지 않아도 글은 쓰였다. 나로 섰던 일상이 연고였는지, 어느새 상처는 과거가 됐고, 완연히 아물어 흉터가 생겼다. 그리고 그 흉터가 내 삶의 레퍼런스가 됐다. 내가 얼만큼 일을 해야 행복한 지, 얼만큼 하지 않아야 행복한 지, 사람을 얼마나 만나야 하는지, 모든 항목의 기준치를 만들어주는 레퍼런스. 그게 생기고 나선 좀처럼 욕심나는 것이 없었고, 자연스레 체하지 않았다. 물론 체기가 가신 후에도 몇 번은 나도 몰래 조바심이 흐를 때가 있었다. 그래도 예전만큼 쏠리지 않았다. 괜찮아서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질 걸 알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의 전환은 한 엽편소설집을 읽다가 맞닥뜨렸다. 백수린의 소설집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에 수록된 <언제나 해피엔딩> 속의 주인공은 끝을 앞둔 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일궈 온 것들에 대한 미련, 지난 날에 대한 후회, 앞 날에 대한 걱정이 뒤엉켜 마음의 동굴을 파고 들어가던 때, 우연히 다니던 대학원에서 박 선생과 말을 나누게 됐다. 박 선생은 그럼에도 무언가 끝이 나면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건넨다. 그 한마디의 잔상에 민주는 생각을 멈추고 여기의 온기에 집중한다.


“…… 괜찮아지나요?”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은 아무런 말 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파본을 치우고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그녀의 미래를 상상해보려 했지만 어느 쪽도 잘 그려지지 않았다.

민주는 잠깐 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여기의 온기에 집중하기 위해 아직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글쓰기 100일 프로젝트의 포문을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연 건 든든한 언덕을 만들어두고 싶어서다. 앞으로 100일 간 어떤 마음이 내게 닥칠 지 모른다. 활자가 바닥나 초조해질 수도 있고, 끝나지 않는 시간을 원망할 수도 또는 끝나버린 시간을 후회할 수도 있다. 그 순간의 모든 감정도 결국 내가 감내해야 할 나 자신일 테니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감정들은 반드시 가라 앉을 테고, 내일은 또 내일의 글을 써내야 할 것이다. 이 정해진 일정이 내게 안정제가 됐음 한다. 여태 아무 글도 써 본 적 없지만, 앞으로 100편의 글을 써낼 거니 괜찮아질 거야. 하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도록 말이다. 당장 체르니 30번은 칠 수 없지만, 사과 한 칸 정도는 색칠할 수 있던 피아노 학원에 다닐 적처럼 딱 하루만큼의 사과를 체하지 않게 잘 채워보려 한다. 그러면 그 끝은 언제나 해피엔딩이 있지 않을까.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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