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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5. 2021

아플 땐 약국 말고 책방에 갑니다.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책 좋아하세요? 저는 많이 좋아합니다. Jpg를 넘어 mp4가 만연한 세상에서 왜 이렇게까지 txt에 애정을 쏟냐 하면, 진짜 재밌어서 그래요. 저는 교양 목적으로 책을 읽지 않아요. 오로지 오락과 유흥밖에 없습니다. 자극에 약한 제가 도대체 어떻게 책을 좋아하는 가 하면, 아무래도 글의 잉여성 때문이겠죠. 우리가 쓰는 언어는 80% 이상 잉여가 포함돼있다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글은 늘 쓴 사람의 의도와 다르게 읽히고 쓰이죠. 이 어긋남으로부터 오해가 일어납니다. ‘그럴려고 쓴 건 아닌데’ 누군가는 쌩뚱맞게 감동을 받기도 하고, 사실은 그리 공감가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공감하고 미소짓죠. 그래도 상관없는게 책입니다. 왜냐면 그 과정에서 아무도 해를 입지 않거든요. 어찌됐던 책은 읽는 사람이 있어야 독서가 가능하며, 읽는 사람 또한 쓰는 사람과 동등한 독서의 주체이므로 어떻게 읽든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죠. 마음껏 오해해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실체를 가진 누군가의 사연을 내게 맞춰 편집해 과잉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실체가 없는 존재에 대해서 어떠한 가해없이, 충분히 오해해도 됩니다. 그렇게 실컷 내 시선에 맞춰 읽다보면 욱씬거리던 마음 저편이 풀리기도 하고, 언제그랬냐는 듯 금새 괜찮아지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저는 유튜브, 넷플릭스만큼이나 소설이 좋아졌습니다. 본업 오해쟁이 부업 편견쟁이인 저에게, 책만큼 좋은 친구는 없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좀처럼 자기 감정을 직면하는 장소가 없어진 듯해요. 사회를 투영한다는 SNS를 볼까요? 옛날옛적 싸이월드에는 눈물 셀카가 흔했어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장소에, 내 눈물을 찍어올려도 괜찮은 시절이었던 거죠. 그때는 행복과 기쁨 뿐만 아니라, 슬픔도 얼마든지 전시될 수 있었고, 그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어요.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요? 그 시절의 눈물 셀카를 ‘흑역사’라며 끌어 올리곤 하죠. 어느 샌가 감성은 오글거리는 것으로 치부되고, 눈물은 약점으로 꼬집혀 둘둘 감싸지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의 인스타그램은 감성을 글과 감정으로부터 찾지 않고, 어떤 공간의 분위기 그러니까 환경에서 찾아내고 있죠. 부와 미모를 겸비해서요. 도무지 요즘의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슬픔은 그러면 없어진걸까요? 저는 아무래도 꼭꼭 숨겨진 슬픔이 마음의 어드매에서 곪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인사이드아웃의 슬픔이처럼, 그려놓은 원 안을 자꾸만 벗어나려 해서 원망을 사고, 미움을 받으며 도외시 되는 건 아닐까요? 어쨌거나 슬픈 우리도 우린데, 우리는 그를 별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아합니다.
그러면, 방구석에서 꺼내보는 건 어떨까요? 혼자만의 벽과 천장에 둘러쌓여 오롯이 혼자가 됐을 때, 나의 슬픔과 우울을 꺼내 보다듬고 인정해 볼까요. 아무래도 혼자선 무리겠죠?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에도 감정 쓰레기통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슬픔을 나눴다가 슬픈 사람이 둘이 되면 어쩌나 고민되기도 하겠죠. 그러니 우리 책을 펴봐요. 소설 <명랑한 은둔자>는 자타공인 INFP 책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그래서 제 인프피 친구들에게 소개하기도 하고 직접 읽어보기도 했는데요. 웃긴건 하나같이 ‘나보다 심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요, 소설은 일단 나보다 나은 인물은 별로 나오지 않아요. 그런 사람들은 SNS에도 실컷 있으니까 열기 전까진 뭐가 있을 지 모르는 책 속에 갇혀있을 필요가 별로 없죠. 그 대신 못나고 적나라한 인물이 살고 있어요. 소설 <시선으로부터>에서 시선은 독서란 소설 속의 인물과 나누는 대화라고 합니다. 우리 그런 가상의 인물과 함께 대화를 나눠 볼까요? 생각보다 근사하고, 어쩌면 너무 선연하고, 그럼에도 온기 어린 공간이라 확신해요. 무엇보다 이 좋은 걸 혼자만 볼 수 없으니까요! 분명히 존재하지만, 아무데서도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을 같이 읽어봐요 우리.


“책은 우리를 타자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란다. 그리고 나 자신보다 더 나와 가까운 타자는 없기 때문에, 더 자신과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 거야. 그러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타자인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행위와도 같은 거지. 설령 그저 심심해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책을 읽는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요즘 책방 할아버지를 검진하러 오는 의사는 평소처럼 혈압을 재고는 꼭 이렇게 덧붙인다.
“아주 멋진 일이에요, 피키에 씨, 젊은 제자와 함께하는 작업 말이에요. 육 개월만 더 계속한다면 약국이 싹 사라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시게, 대신 책방이 생길 테니까.”

그레구아르와 책방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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