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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5. 2021

안녕이라고 내게 말하지마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


나는 기차를 자주 탄다. 주기적으로 집에 오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회귀본능 때문에 한달에 한번은 꼬박꼬박 부산에 오갔으니, 그것만 해도 벌써 1년에 24번은 타는 셈이다. 처음 기차를 탈 때는 몇 주 전에 미리 예약해두고 탑승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해 기다리곤 했다. 평생을 한 동네에서 살았고 여행을 자주 가는 편도 아니라 멀리 간다는 게 마냥 설렜다. 그렇게 서울에 올라가고 나서 집에 갈 때 타던 경부선은 기차에 올라타 꼬박 3시간을 눈만 붙이면 그토록 그립던 집이 짜잔하고 등장하는 어디로든 문이었다. 또 그렇게 도착한 부산역에선 알게 모르게 비릿한 바다냄새가 나곤 하는데 그 냄새에 눈물이 핑 돌고 보조개는 사라질 틈이 없었다. 향수 병에 거나하게 걸렸던 스무살 때는 기차는 나만의 포탈이었다. 한번의 클릭으로 마을로 돌아갈 수 있는 포탈이었다.






기차 타는 게 점점 익숙해지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 참 괜찮은 핑계라고. 기차에 타서는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무언갈 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달리는 건 기차고 나는 앉아 있지만, 그래도 국토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사실이 별안간 좋아졌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 갈 하고 있다니! 꿈에 그리던 돈 많은 백수 혹은 건물주가 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풍족했다. 그러다 스물 한살이 되던 겨울, 방학 내내 부산에 눌러 앉았다. 짐도 다 가지고 내려와버렸다. 서울이 너무 추워서 그랬다. 그 겨울 서울은 너무 추워서 살갗도 마음도 빨갛게 얼어있었다. 이러단 떨어져 나갈 거 같아서 도망치듯 내려왔다. 그런데 부산의 겨울은 너무 짧아서, 몸도 마음도 충분히 녹이지 못했는데 봄이 오더라. 어쩔 수 없이 나는 두 달 만에 서울에 다시 올라가야 했다. 그 때 처음으로 기차가 원망스러웠다. 이걸 탄다는 건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가족에게 다녀와가 아니라 잘가를 들어야 하는 모든 순간이 싫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세상이 나를 그 포탈로 다시 밀어 넣었다. 거꾸로 돌아 내려올 수 없는 에스컬레이터였다. 아무리 뒤를 향해 걸어도 결국 느린 속도로 올라가게 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에는 알게 모르게 바빴다. 뭐가 그렇게 바빴는 지, 꼬박 세 달을 부산에 내려가질 못 했다. 혹자에겐 별 일 아닌 일이겠지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산의 봄을 보지 않은 해였다. 캠퍼스의 벚꽃은 아름다웠지만 시끄러웠고, 겹벚꽃은 찬란했으나 낯설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내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잘 보살필 만큼 상냥하지 않았다. 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잡음은 무시한 채 당장의 찬란을 즐길 뿐이었다. 여름이 끝나기 직전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이젠 이 공간이 싫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흘러 간다는 감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렇게 빠른 걸 타고도 꼬박 3시간이나 걸린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돌아가려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이런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단 게 좋지 않았다. 친한 언니는 본가가 인도네시아에 있는데, 공항이 너무 싫다고 한다. 그 공간에만 가면 누군가 떠나거나 아니면 내가 떠났다고, 그래서 싫다고. 그 말이 차갑게 와닿았다. 기차는 마음을 잇는 곳이 아니라, 원래 몸도 마음도 다 이어져 있다가 몸을 잡아 떼내 겨우 마음만 이어져 있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 해 여름엔 부산에서 소란한 친구들이 서울에 올라왔다. 만나서 집단적 독백만 하는 모임이고, 어째선지 처음 만난 열다섯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나의 열다섯들이었다. 생일조차 지겨워서 챙기지 않는 사이인데, 진짜로 나를 보러 서울에 올라 왔다. 믿음이 안 가서 일백번 고쳐 물었다. ‘진짜 내 보러 온 거 맞나?’ 진짜 나만 보러 왔다. 이 지독한 무계획파는 기껏 홍대에 숙소까지 구해두고 낮에는 늘어지게 잠만 자다가 일정이 끝난 내가 돌아온 밤이 돼서야 움직였다. 서울에서 가장 많이 웃었던 사흘이었다. 얘네만 있으면 어딜 가도 축제였다. 롤플레잉방탈출을 하러 가서 누가 범죄잔지 찾아야 하는 그때도 우린 배가 찢어지게 웃었다. 그러다 친구들이 부산에 내려갔고, 나는 남겨졌다. 아예 없을 때는 몰랐는데, 있다가 없으니까 마음이 자꾸 사무쳤다. 얘네를 데려가는 버스도 미워졌다. 정작 오랜만의 여행에 지친 친구들은 쿨하게 버스에 올라타서 기절했는데 나만 그 커다란 버스를 미워했다.






서울에 산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같이 여행을 가도 갈 때의 출발지와 올 때의 도착지가 달랐다. 정말 그 찰나의 시작과 끝만 다른 건데, 그걸 뺀 중간이 너무 좋아서 자꾸 시작도 끝도 욕심 났다. 나도 역사에서 만나 누가 지각하고, 누가 짐이 너무 단촐하고, 누가 늦잠을 잤고 하는 시시껄렁한 에피소드에 등장하고 싶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단자리 수이던 지난해 겨울, 순천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친구들은 먼저 도착해 있고, 나는 호남선을 타고 느즈막히 출발했다. 바로 옆자리 승객은 배웅객이 있었다. 그 날 따라 괜한 심술이 났다. 속이 상해서 자꾸 이상한 쪽으로 부패했다. 심술이 잔뜩 끼여서 모난 얼굴을 하고 순천에 내려갔다. 그런데 플랫폼에 도착했더니 친구들이 배웅을 와 있었다. 나보다 키가 작은 둘은 팔짱을 끼고 우산 세개를 나눠 쥐고 있었다. 나인지 한참을 못 알아보다가 에스컬레이터가 거의 끝에 다다랐을 때 발견하고는 내게 걸어왔다. 비가 와서 데리러 온 거였다. 아무래도 구름이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비를 내린 게 아닐까. 친구의 손에 잡으니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모난 데는 간데 없이 둥글어졌고 나는 행복에 겨워 둥글거렸다. 순천에 같이 간 친구들은 명백히 비독서인이다. 어마무시한 전공책 두께도 독서로 치면 엄청난 애독가 반열에 오르는, 대학형 비독서인. 그런데 그들은 내 열렬한 친구라 어느 여행지든지 간에 꼭 서점을 찾아 와 준다. 이 폭신폭신한 상냥함이 좋다. 순천에서도 다름없이 서점에 들렀다. 그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처음 만났다. 양서가 빼곡하던 책장이었지만, 그 제목을 보고 난 뒤 다른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수경 시인은 모국어의 도시에서 살지 않았으나, 모국어로 시와 글을 썼다. 그의 시집을 친구들이 먼저 온 부산행 기차를 탄 뒤, 아직 기차가 오지 않은 역에서 읽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선연한 고독에 입안이 까끌거렸다. 금방이라도 이를 닫으면 고독이 씹혀 아플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시를 읽다 엉엉 울었다. 여태 탔던 기차가 그랬듯, 앞으로의 기차도 좋을 리가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허수경을 사랑하게 했으니 꽤 괜찮지 않나. 어떤 것이든 이겨낼 땐 눈물이 흐르고, 그걸 닦을 글이 있으니 말이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다가

역에서 쓴 시들이 이 시집을 이루고 있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기차는 왔고

나는 역을 떠났다


다음 역을 향하여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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