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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8. 2021

나의 프리지아는 스위트피 향이 날 거야

<수선화에게>, 정호승

사람을 보면 떠오르는 색이 있다. 많이 입는 색의 영향이기도 하고, 성격 따라 가기도 하며, 형언하기 어렵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특유의 분위기에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노란색 사람이다. 내 자신이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지만, 여태 선물 받은 꽃은 죄다 프리지아였고 색깔론 논쟁이 일 때마다 나는 노랑으로 단정짓고 넘어가버린단 점에서 아무래도 확신의 노랑 사람인 듯하다. 그런데 나는 보라색을 사랑한다.

색상환의 대척점이나 다름없는 보라색은 어울리지도 않고 별로 사입으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냥 멀리서 예쁘다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래도 동경에 가깝다.

형용사도 비슷하다. 나에 대한 평가에 붙는 형용사는 대게 '밝은'이다. 나름 낯을 꽤 가린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 눈엔 별로 그리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내게 고민없이 천진해서 좋겠다 말하기도 했다. 내 나름 우주 차원의 고민부터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고민을 안고 사는데, 아무래도 별로 그리 보이진 않는다.

분명히 나는 밝고 활기 있는 편이다. 그런데 매해 소원으로 줄기차게 아늑과 안정을 빌고 있다. 날씨보다 변덕이 심하면서 구름이 아닌 소나무를 꿈꾼다. 감정의 높낮이가 크지 않은 친구들을 사무치게 부러워 하기도 했다. 뭔갈 이겨낼 때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어드는 성정이 좋아 보였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 자꾸 날 마모시켰다.

어울리지 않는 것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환상에 가깝다. 여름의 크리스마스처럼, 정반대편에 있어 소문으로만 들은 환상의 대상. 내 생각보다 보라색과 안정은 별 게 아닐테지만, 내가 나이기에 당연한 것들에 질리면 자꾸 그런 환상에 살을 붙인다. 그런데 이젠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 싶다. 이분법이 아니라 보색으로 여기면 되지 않을까. 서로 정반대에 있기에 오히려 마주잡기 쉽다. 미완인 나의 빈틈을 보라색 따위로 메워보면 어떨까. 그럼 노랑은 더 노랑으로, 보라는 더 보라로 보일거야. 그렇게 섞이다보면 더 아름다워지겠지. 전혀 다르다는 건 닮아갈 게 넘친다는 말과 같으니까.

그렇게 내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아늑은 점점 나에 맞게 그 의미가 바꼈다. 혼자서도 잘 놀고 잘 사는 단단한 소나무의 아늑함이 아니라, 바람만 있다면 영원히 흘러가는 파도의 아늑함. 그게 내가 가진 안정이다. 햇빛에 따라 윤슬의 너비가 달라지고, 구름이 얼룩덜룩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하며, 해안선의 맞닿으면 사각사각 부서지기도 하는 파도. 그렇게 파도는 아주 많은 것에 영향을 받아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어제처럼 오늘도 내일도 흘러갈 거라는 사실. 그런 건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파도의 영원성 혹은 고유성. 그게 내가 나아갈 나의 아늑함이다.

시작은 달라도 양보와 배려를 거쳐 비슷한 모습으로 끝맺는 것. 어울리지 않는 걸 사랑하는 것의 결말은 그랬으면 좋겠다.


내 무거운 짐들이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버리고 싶었으나 결코 버려지지 않는
결국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질질 끌고 온
아무리 버려도 뒤따라와 내 등에 걸터앉아 비시시 웃고 있는
버리면 버릴수록 더욱더 늘어나 나를 짓눌러버리는
내 평생의 짐들이 이제는 꽃으로 피어나
그래도 길가에 꽃향기 가득했으면 좋겠네

정호승, 꽃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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