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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09. 2021

책도 꽃도 좋아하지만요 유투브를 10시간 씩 봐요

<무구함과 소보로>, 임지은

인스타그램은 사람을 단면적으로 만들기 딱 좋은 sns다. 이걸 처음 느낄 땐 이 프레임이 너무 불쾌하고 불편했는데 이제는 이 점을 나름 써먹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 인스타그램이 나를 어떻게 보여주는 지 느낀 건, 주윗사람의 반응 때문이었다. 학생회를 시작하며 술을 정말 나라 잃은 것처럼 마셔 댔다. 일주일에 8번 마시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느새 나도 그들 사이에 껴 있었다. 그러다 술병이 크게 났고 장장 3개월 간 금주를 단행했다. 생각보다 금주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술 못 마시는 것보다 술병 다시 나는 게 더 싫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술자리에 가면 사이다만 주구장창 먹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곤 했다. 다행이도 그런 거에 별로 굴하지 않는 편이라 조용히 안주를 작살 냈다.

그렇게 학생회만 열심히 하다가 오랜만에 학과 친구들을 만났더니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술 뿐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참친구는 술 좀 끊으라 타박했고, 술을 즐기는 찐친구는 술집 공유 좀 해달라 졸라댔다. 거기에 대고 '나 요즘 술 잘 안 먹어'라고 열심히 대답했지만, 정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나의 '술 안 먹어'는 그러니까 그런 거였다. 주정뱅이가 어제 하루 냅다 달리고 오늘 하루를 망치고 나서 하는 '내가 이제 다시 술 마시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24시간 짜리 진심. 세상에! 나는 3개월이나 금주를 했는데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3월에 같은 소릴 들었으면 합죽이 하고 반성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저히 해명될 길이 보이지 않았다. sns 때문이었다.

술자리만 가면 스토리에 해시태그를 잔뜩 달아서 올리는 사람이 하나 씩은 있었다. 예전엔 나도 그런 사람이기도 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니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초록병과 내 아이디가 엮여서 올라오는 스토리가 그렇게 많은데 술 안 먹는다는 게 말이 되냐는 식이었다. 꼼짝 못 할 물증이었다. 그럼에도 억울했다. 대부분은 앉아서 사이다만 먹다가 도망 갔고, 뒤늦게 친구 데리러 간 자리도 있었고, 일단 그 모든 스토리도 다 최소 한두달은 된 거였다. 그렇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동영상 혹은 사진 프레임 안에 술과 내 아이디가 있다는 것만 기억 됐다. 그래서 나는 억울한 sns알코올중독자가 됐다. 그 이후로 술 태그는 전부 지워버렸고 내 손으로도 한번도 올리지 않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게 기억됐다. 술과 나는 이미 조건화가 될 대로 다 된 상태였다.

그땐 그게 너무 억울하고 분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하면 마음 깊숙이 찔려서 그랬던 거 같다. 사실 많이 먹긴 했으니까. 근데 알코올 중독 테스트 항목에 꼭 있는 '주윗 사람이 나더러 술 좀 그만 먹으라 잔소리 한다.'라는 항목에 알게 모르게 뜨끔했었다. 아무튼 그 때는 그 진실 섞인 오해를 죄다 sns의 탓으로 돌렸다. 그때 쯤 전공 기초 시간에 '프레이밍 이론'을 배웠던 거 같다. 전공 지식을 이용해 열심히 인스타그램을 헐뜯었다. 아무래도 술을 끊기는 어려우니까.

코로나가 창궐한 이후에는 책과 꽃에 빠졌다. 밖에 나갈 수 없으니 방에 두자 싶어서 화분과 화병을 들였고, 내 새끼가 너무 예뻐서 자주 찍어 올렸다. 어른들이 카카오스토리에 꽃 사진을 그렇게 올리는 이유를 이해해버렸다. 정해진 일정이 우후죽순으로 취소되니 할게 없어서 책을 읽었다. 그 중 같이 읽었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페이지는 찍어 올리곤 했다. 책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도서 리뷰도 꽤 올렸다. 그러다보니 sns가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피드에는 개인 일상보다 책 리뷰가 많아졌다. 물론 친한친구 스토리에는 어마무시한 아이돌 사랑과 각종 TMI가 여전히 넘쳐 나고 있긴 하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나를 문학소녀로 안다. 엥 세상에나.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싶어 내 sns를 훑었다. 매~우 그럴만도 했다. 올리는 게 책과 꽃 뿐이었다. 비대면으로 많이 만날 수도 없게 된 상황에서 친해진 사람들은 나를 sns로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꽃과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군! 이라고. 썩 나쁘지 않은 평판이라 그냥 즐기고 있다. 어쩌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문학소녀 대내적으로는 열렬한 빠순이가 됐다. 요즘에는 좋아하는 아이돌이 줄줄이 컴백하는 바람에 빠순이 에고가 더 커져서 sns 속 문학소녀는 별 힘을 못 쓰고 있다. 새로 알게 된 동생이 정말 순수하게 '언니는 매일 책만 읽어요?.. 대단하다..'하고 물어왔다. 요즘 내가 메일 보는 건 브이앱이고 읽는 건 스케줄 표고 쓰는 건 버블 답장이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근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내 오래된 친구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웃긴 데 너라고 안 그렇겠니. 우리 이 아이의 환상을 지켜주자. 이런 말을 눈빛으로 열심히 보냈다.

sns는 겨우 나도 지독한 술쟁이에서 단단한 문학소녀로 바꿨다. 정치인도 sns로 이미지 관리를 하는 세상이다. 기술은 우리가 사는 3차원을 넘어 4차원으로 가고 있는데, 사람은 2차원으로 보고 있다. 세상은 다양해지고 있다는데 한 개인 앞에 붙는 단어는 도통 다양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간 우리 모두가 심즈의 심이 되는게 아닐까. 10가지도 안되는 기질로 인격이 형성되고, 그런 걸로 단정지어지고, 묶이고. 16가지로 사람을 나누는 mbti 성격유형검사가 대유행하는 게 그런 조짐이면 어떡하나. 예전엔 4가지 혈액형 13가지 별자리가 다였다면, 이제는 그래도 좀 늘어서 16가지가 된 거라면? 자기 소개할 때 sns를 들이밀거나, mbti를 알려주거나 하는 날이 머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세상은 너무 재미없을 것 같다. 오차와 예측불가능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며, 겨우 몇가지의 경향성이 정체성이 되어선 안 되니까. 프레임이 주는 장점은 하나 밖에 없다. 궁극의 편리함이다. 그것 말고는 모든 게 단점이다. 그런데 그 강력한 장점이 모든걸 프레임에 안에 집어 넣어 버린다. 거기에 메여선 안 된다고 수만번을 다짐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편리함을 거부하고 돌아가는 일은 늘 그랬듯 거추장스럽다. 우습지만, 그럴 때마다 그때 그 시절의 술보미를 기억하려 한다. 그때의 그 억울함을 타산지석 삼아 보여지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나를 그렇게 보는 건 어쩔 도리가 없지만, 나는 그런 시선으로 사람을 프레임에 가두지 않겠다. 그 프레임의 이름이 기대일지라도, 아무 것도 걸지 않고 그냥 두겠다. 그래야만 하겠다.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고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

지워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사를 사랑합니다.


<간단합니다>, 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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