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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10. 2021

운수 좋은 날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세상을 다정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원래 다정이라는 속성이 그렇다. 알아차릴 만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온인 다정은 드문 데도 평범한 것이다. 아이에게 하늘을 그리라면 장마철에도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그런데 이 관심이란 건 본디 여력이 필요한 일이라 바쁘디 바쁜 현대 사회에는 참 두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관심은 지금 내게 아주 알맞은 뜨거운 감자다. 하루일과가 텅텅 비어 있고 다만 글 한 편을 쓰는 게 다인 매일을 사는 깡백수 휴학생에게는 발에 채이는 게 여유고 여력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언제나 곁에 있던 다정들을 자주 포착했다. 마스크 속 입꼬리가 내려 올 틈이 없던 하루였다.




간만에 밖에 나갈 일정이 생겼다. 기온도 하늘도 확신의 봄이라 후드 한장을 걸치고 문 밖을 나섰다. 집에서 역 까지 가는 길엔 시장이 있다. 시장의 부산함이 좋아서 늘 그 통과해서 가곤 하는데, 거기에는 늘 다정하게 맞이하는 건어물 집 아저씨가 있다. 마당발 할머니가 벌써 이 동네 시장을 접수했는 지, 아저씨는 이미 나를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크게 아는 체를 하진 않으시고 그저 웃으면서 인사하신다. 넉살 좋은 장사꾼이란 버릇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어떤 초등학생이 내 앞을 가로질러 뛰어 갔다. 아저씨는 그 꼬마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아는 사이인 지 태권도 학원 가는 길이냐 물었고 꼬마는 아니요! 태권도는 어제고요, 오늘은 피아노에요! 하며 똘망똘망하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웃으며 까먹었다고 다음엔 꼭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꼬마는 그 말에 만족한 듯 씩씩하게 인사하고는 피아노 학원으로 다시 뛰어 갔다. 그걸 귀로 엿들으며 기분 좋게 걸어 가는데, 어떤 할머니 손님께도 싹싹하게 인사하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의 인사 덕에 조금 쌀쌀한 가 싶던 날이 영락 없는 봄의 장면이 됐다.




1호선에 올라 탔다. 부산 지하철은 서울과 달리 한 칸의 폭이 좁고 열차 길이가 짧다. 그래서 마을 버스처럼 먼 좌석의 목소리도 가찹게 들린다. 노인 인구가 굉장히 많은 도시라 늘 노약자 석은 복작복작하다. 어느 시간 대에 타도 그렇다. 환승역에서 내리려는 찰나, 한 아주머니가 '어머니 이 다음 역에서 꼭 내리셔야 해요!'하고 크게 외치셨다. 노약자석에 앉아 계셨던 한 할머니가 알겠다 답하시고 고맙다고 여러번을 고쳐 전하신 걸 보면 아무래도 길을 물으신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정신 없는 환승역에서 할머니께 한 번 더 알려드리느라 때 맞춰 내리지 못 할 뻔 하셨다. 그래도 무사히 내렸고, 아마 할머니께선 무사히 다음 역에 내리셨을거다. 그러고 나선 바삐 인파 속으로 사라지셔서 나도 내 갈 길을 걸어갔다. 정말 내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자꾸 다정을 만났다. 운이 좋은 날이다.




친구를 만나 일정을 마무리하고 서로 반대 편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 시간 지하철은 어디든 북적거리고 정신 없지만 그래도 여긴 치열한 줄서기와 비열한 새치기가 없다. 지난 해 봉사활동을 종각역 근처에서 했었는데, 한번은 봉사가 끝나고 종로서적에서 책을 읽다 느즈막히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부턴 다신 그러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퇴근 시간 종각역은 플랫폼이 사람 머리로 가득 차 있었다. 위에서 보면 정수리나 뒷통수 밖에 안 보여서 더 끔찍했다. 모두가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휴대폰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 열차가 도착하자 그 네모칸에 어떻게든 들어가려고 모두가 들이 밀었다. 먼저 내리고 타라는 말은 이미 무색해질대로 무색해졌다. 내리는 사람을 기다리고 서 있으면, 뒷 사람이 내 앞을 가로질렀고 나는 꼼짝없이 다음 차를 타야만 했다. 가득 차긴 했지만 기다리고 탈 정도의 여유는 있다. 여유가 없는 건 종류가 무엇이든 사람을 옹졸하게 만들고 시야를 좁힌다. 그렇기에 서울에 비해서 그런대로 넉넉한 부산이 좋다.




환승역을 한번 지나고 나면 열차 안은 금방 헐빈해진다. 그 즈음에 노약자석에서 나지막한 전화 소리가 들렸다. 한 할아버지가 딸의 전화를 받고 계셨다. 작은 목소리로 딸의 안부를 뭉뚱그려 여러 번 물으셨다. 한참 동안 걱정도 위로도 응원도 전하셨다. 딸아, 딸아, 읊으시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살면서 들은 것 중 가장 좋았던 전화 애정행각이었다.




어쩌다보니 하루종일 다정한 사람들의 세상의 배경에 걸쳐 있었다. 다정은 알아보기 어렵지만, 하나를 알아차리면 두개 세개 째 다정은 금방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선 별과 닮았다. 지금도 하늘은 별로 빼곡히 메워져 있는데 다만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다정도 그런 걸까. 우리 세상의 온도를 늘 적절하게 메우고 있는데 다만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일 뿐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세상이 영 눈부셔 지는 것 같다.






"그럼 지구상에 먹고 먹히는 관계랑 그렇게 서로 돕는 관계랑 어느 쪽이 더 많은지도 아니? 아닌가? 그걸 숫자로 비교할 수는 없으려나?" 웅이 입으로 잔을 가져가려던 동작을 멈췄다. "어쨌거나 그렇게 알려 줄 수는 있다는 거지? 니모부터 꽃 한 송이까지 자연에도 공생이 넘쳐난다고. 그게 막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은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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