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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11. 2021

모르셨겠지만 지금부터 알아주세요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 쇼노 유지

휴학하면서 100일 글쓰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주중에는 하루를 쥐어 짜내는 에세이로 토요일엔 주간 독서 현황, 일요일엔 주간 글쓰기 점검으로 구성 돼 있다. 다분히 글과 책 단 두가지에만 집중한 짜임이다. 그래서 몰랐겠지만, 사실 주중에 쓰는 에세이는 모두 인사이트가 된 책 또는 글과 엮여 있는 책을 한 권 씩 소개하고 있다. 오늘은 왜 소설을 곁들이게 됐는 지에 대해 말해 볼까 한다.



그 날은 주전자가 그리고 싶었는데, 막상 그리려고 하니 도저히 떠오르지가 않아 미술 선생님께 달려갔다. 주전자 쯤이야 몇초면 그릴 수 있으셨겠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해주신 얘기가 있다. “무언가 그리고 싶다면 그 물건이 어떻게 쓰이는 지, 그 쓰임새를 한번 돌이켜 봐요. 그러면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러고 돌아가서 한참을 생각하다 보니 몸통에 주둥이만 달려있던 나의 주전자는 손잡이가, 뚜껑이, 낮은 주둥이가 생겼다. 얼추 주전자의 꼴을 갖춘 그림이 뿌듯해서 선생님께 바로 달려가 자랑했고, 그 때 잘했다며 “이제 앞으로 그리고 싶은 건 뭐든 그려낼 수 있을 거에요”라 덧붙여 말하셨다. 열다섯 중학교 미술시간의 이 일이 요즘 들어 다시 생각나는 건 아마 지금 내 앞에 놓인 이 백지에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 지 아득하기 때문일테다. 그래서 선생님이 가르치신대로 내가 그릴 이 그림이 어떻게 쓰일지, 그 쓰임에 대해 천천히 돌이켰다.



뚜렷한 목적성은 있었다. 내 글이 미미하게 나마 소설 영업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소설 읽으세요’라는 말을 건네려면 내가 소설을 왜 읽었는 지, 뭘 얻었는 지 알아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8년 전 미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던 대로, 내가 소설을 즐기기 시작한 그 때로 돌아가봤다. 내 독서엔 유구한 역사가 없어서 멀리 가지 않아도 되었다. 때는 작년, 감염병의 확산 이후 번번이 취소되는 일정의 빈공간을 유튜브와 넷플릭스로 채웠다. 그렇게 하루 종일 화면만 보고 살다보니 하루의 끄트머리 쯤엔 늘 눈이 멍하고 어딘가 답답했고, 그 갑갑함을 벗어보고자 책으로 도망갔었다.



요즘의 소설엔 복도에서 떠들다 함께 혼나던 소꿉친구 이성연애 이야기도, 츤데레 남자주인공의 과격한 구애에 감동하는 여자주인공 이야기도 없었다. 그보다는 그 어떤 것도 열렬히 사랑하던 중학생이, 사랑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대학생이, 순진하게 살기엔 세상을 너무 알아버린 여성이 살고 있다. 이처럼 요즘의 현대소설에는 하루에도 수 건의 여성범죄가 일어나고, 일상 속에서 웃을 수 없는 농담을 마주하는 난감한 상황이 수시로 찾아오는 지금이 담겨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대의, 있을 법한 이야기.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많은 시선 중 한 조각의 양. 전에 없던 언어의 생성으로 점점 쥐도 새도 모르던 죽음이 쓰여지고, 흩어졌던 조각이 맞춰져 간다. 소설의 의의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데 있다. 돌이켜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금의 소설이 폭로하고 있는 그림자는 어떤 것일지, 나의 사각지대에 있는 시선을 알고자 소설을 읽어간 듯 싶다.



그래서 이 글의 쓰임 역시 내가 했던 경험 그대로, ‘시선의 확장’이었으면 했다. 서로 간 거리를 두기 위해 무수히 세웠던 벽에 가둬진 우리의 시선은 전보다 넓어진 사각지대가 생겼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닌 것이니 우리는 늘 시선 밖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좌시할 필요가 있다. 그 시작을 트기 위해 나는 전면에 책을 두는 게 아니라, 말미에 책을 뒀다. 책을 읽는 알고리즘도 그렇지 않나. 책을 읽으려면 책을 고르고 덮힌 책장을 열어 책입(책등의 반대 부분)과 마주해야 한다. 별 거 없는 내 글을 그래도 읽게 할 명분을 만들려면, 내 글이 표지가 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싸고 있는 책의 위대함과 유익함에 기대어 신나게 내 언어로 포장하면 나는 앞섰음에도 부담을 덜 수 있으며 또 더 든든하고 자유로워 지리라 믿었다.



어쩌다 보니 이 글쓰기를 계기로 읽은 책을 더 많이 자주 들여다 보고 있다. 또 어찌 됐던 약 80개의 글을 채우려면 80권의 책이 필요해서 새로운 책을 서슴없이 읽기도 한다. 아직까지 내 독서는 편협하고 약소하지만, 내가 고른 책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더 널리 알려져야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입이 펼쳐졌으면 한다. 이 오지랖이 부디 닿길 바래서 자꾸 쓰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쓰고 있는 모든 글은 어쩌면 길고 긴 팬레터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세상은 헤매지 않도록, 틀리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지도 앱이 있으면 처음 가는 곳이라도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쇼핑을 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가격과 기능을 비교해 싸면서도 인기 높은 상품을 산다. 영화를 보기에 앞서 또는 책을 사기에 앞서 인터넷 댓글이나 별점을 확인해 평판 좋은 작품을 고른다. 음악은 인터넷으로 미리 듣고 나서 앨범 속 마음에 드는 곡만 내려받는다. 다들 영리해진 탓에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학창 시절, 들어보지도 않고 재킷만으로 선택한 레코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된다거나(대실패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딱히 취향이 아니었던 곡이 자꾸 듣다 보니 그 앨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된 적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고르고 고르다 보면 '미리 정해진 어울림'밖에 만나지 못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되기에 감동한다.
쇼노 유지,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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