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르게이 Nov 04. 2017

검정천은 레깅스를 입었다.

세르게이 연재 일기_산티아고

< Boadilla Camino > D+5 59.0 km / 107,173 STEPs

길을 걷다 보면 지칠만 한 즈음에 카페나 바가 등장한다. 그들은 약할 대로 약해진 순례자들의 마음을 살살 건드린다. 마치 자원 봉사자라도 되는 듯이 고작 1유로짜리 샌드위치로 순례자들을 유혹한다.


처음에 카페를 볼 때는 나 모르게 활동하는 서포터 같았다. 언제나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지지 못하게 등장하는 쉼터 같았다. 한 시간, 두 시간 걷다가 가방을 내려놓으면 몸이 그렇게나 가벼울 수 없다. 그리고 얼음을 동동 띄운 콜라는 그 야말로 온몸에 힘이 솟아나게 만든다.


카페가 주는 여유가 너무 고맙지만, 때로는 끝없이 나타나는 이 카페들은 꼭 쉬어야 할 때가 아닐 때에도, 순례자의 발목을 잡고 유혹한다. 그래서 이 카페들이 인생에 쉴세 없이 등장하는 유혹 같기도 하다.


마을 도착은 조금씩 늦어지고, 오랜 걸음에 열이 올랐던 몸이 식어 추위를 느낀다. 또한 쓰지 않을 돈까지 쓰게 되는 것이다. 실상 1유로 샌드위치가 간판에 적혀 있더라도 막상 식빵에 소시지 하나 들어가 있는 볼품없는 샌드위치를 보면, 다른 메뉴들에 손이 가기 때문이다.


난 그 유혹에 한번 더 넘어가 주기로 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종아리 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이 땀에 젖고 짖밟혀 축 늘어졌다. 누런 양말이 꼭 지친 내 모습 같다. 카페 한 귀퉁이에 오징어를 말리 듯 양말을 널었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 사이에 있는 거뭇거뭇한 것들에 손이 갔다. 고생한 발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허리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거뭇거뭇한 것들을 손 봐주고 있었다. 카페에 앞을 지나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검정천이 보였다.


전혀 독립적인 두가지 일이 함께 일어나 좋은 추억이 되곤 한다. 하지만 우린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검정천은 내 발과 손 그리고 얼굴을 보고 지나가버린다. 그리고 건정천 옆에는 며칠 전 검청전과 함께 있던 마약 머리가 있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놀이터에서는 무슨일이 있었던 건지, 아무튼 둘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들은 카페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다. 검정천은 오늘 검정 레깅스를 입었다. 마약 머리의 가방은 제대로 갖추어진 게 없었다. 덜렁거리는 배낭 머리 부분과 이리저리 마구 꾸겨 박은 듯한 양말, 물통, 옷가지들. 가방을 싸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만드는 허술함에 감탄했다. 그런 모습을 그녀는 모성애로 해석했다.


들어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쓰는 거로 보아, 둘은 같은 언어를 쓰는 유럽계인 것 같다. 같은 언어를 써도 이해 하기 힘든 여자 마음. 다른 언어를 쓰는 내가 그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역시 언어 핑계가 최고다. 못알아 듣는 건 다 개소리.


쓴 사람 - 권세욱 - facebook.com/kwonsewook

오타 사냥 - 강보혜 - @bh.k 

작가의 이전글 우연의 반복은 인연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