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여섯 번째 이야기
J는 내게 하루간의 자유시간을 제안했다. 따로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J 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은 샌프란시스코 근교인 산호세(San Jose), 그곳에 있는 스탠퍼드 대학과 구글 본사였다. 기차로 꽤 오랜 시간 왕복해야 하는 탓에 힘든 여정이 예상되었는데 내가 관심 없어할 것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얼떨결에 자유시간을 얻었지만 나는 따로 생각해 둔 곳이 없어서 뭘 해야 할지 방향을 잃었다. 급하게 생각한 일정은 세 가지였다.
첫째, 근처 카페에 가서 그림 좀 그리다가 숙소에서 쉬기
둘째, 금문교 건너편 예술가의 마을 구경하기
셋째,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놀기
J는 내게 샌프란시스코 근교 예술가의 마을 '소살리토'를 추천했다. 그저 집에서 쉬기는 하루가 너무 아깝다는 의견이었다. 귀가 얇은 나는 일단 '숙소에서 쉬기'를 보기에서 제외시켰지만, 금문교를 건너 소살리토까지 가기엔 상상만으로도 지칠 것 같았다.
그날 밤새 구글맵을 붙든 결과 다운타운에 있는 SFMOMA에 가기로 결정했다. 적당히 익숙한 길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보고, 그 뒤 J와 만나지 못하면 전날 다녀온 레스토랑에서 혼밥을 할 계획이었다.
26일 당일, 정작 J는 귀찮다며 산호세에 가는 계획을 취소했다. 나를 따라 SFMOMA에 가자고 했더니 그건 또 싫었나 보다. 결국 J는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와 팰리스 오브 파인아트(the Palace of fine arts)에 가게 되었고, 미술관에 가게 된 나는 J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했다.
숙소 1층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 트램을 타고 유니언 스퀘어 근처에 내렸다. 이미 커피를 마셨지만 블루보틀에 들러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하루 2 커피를 하기로 했다. 샌프란시스코엔 블루보틀 1호점이 있어 다들 그곳을 찾아가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1호점은 아니지만 다운타운 한복판에 있는 블루보틀에 들러 라테 한 잔과 부탁받은 텀블러 하나를 구입했다. 텀블러는 아직 국내에 미출시된 디자인이었는데 블루보틀 텀블러 중 가장 예뻐 보였다.
커피가 나오고 매장 스탠드 테이블에 서서 잠깐 커피를 즐겼다. 뭐 특별할 것은 없는 맛이었다. 역시 무슨 사업이든 브랜딩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들고 이어폰을 꼽은 채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을 누비니 뭔가 현지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 날 미술관에 간다고 빼입고 나왔는데 항상 편하게 입고 다니다 오랜만에 드레스업 했더니 미드 '섹스 인 더 시티'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SFMOMA는 천장이 매력이었다. 새하얀 건물에 천장을 통해 보는 파란 하늘과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조화로웠다. 천장을 안주삼아 로비에서 남은 커피를 털어 마시고 전시관에 입장했다.
사실 나는 SFMOMA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유명한 작품들은 다 보고 가고 싶었는데, 운이 좋게도 SFMOMA 무료 도슨트 어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단하게 다운받아 메인 작품들과 여러 그림에 대한 설명들을 들을 수 있어 관람의 질이 높아졌다.
들어가자마자 본 그림은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갔는데 첫 작품부터 전율이 오를 정도로 좋아서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자신의 부인을 그렸다는 그 그림은 민트색이 돋보이는 여러 색들의 조합이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이런 그림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SFMOMA에 온 가치가 있었다. 옆에는 그림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있었다. 영미권 국가의 장점은 서툴게라도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플에서 나오는 내레이션을 들으니 더 풍요롭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앙리 마티스 다음으로 좋았던 그림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이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처음 봤는데 현대미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직접 보지 않고서야 가치를 알 수 없을 작품들을 보니 내가 얼마나 미술에 무지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별 것 없어 보이는 그림은 보기만 해도 빠져드는 듯한 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색이 깊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마크 로스코는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는데 실제로 그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나 역시 몇 가지 색이 그려진 커다란 캔버스 앞에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 마크 로스코의 전시를 알아보다 몇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기사를 보고 전시회에 가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 뒤 SFMOMA에서 여러 설치미술들을 봤고, 앤디 워홀 등의 팝아트도 볼 수 있었다. 현대미술의 매력은 알았지만 팝아트의 매력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미국 하면 팝아트가 떠올라서 꽤나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스러웠다. 관람 초반에 받은 감동을 또다시 느낀 일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귀가 전 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한번 더 보고 미술관을 나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J에게 저녁 여부를 물어봤더니 같이 먹기 힘들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24일에 저녁을 먹었던 레스토랑에 다시 가기로 했다. 이번엔 반드시 홍합을 먹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트램은 다운타운을 벗어나 레스토랑이 있는 거리에서 멈췄다. 이브날과 다르게 레스토랑 앞은 대기하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름을 올려놓긴 했지만 오래 기다릴 정도로 먹고 싶진 않았는데 서버가 나와 대기 명단을 확인하더니 나를 불렀다. 1인 손님은 실내에서 먹으려면 bar에 앉아야 하고 테라스에서 먹을 경우 바로 자리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날이 꽤 추웠지만 테라스에서 식사하는 로망도 이룰 겸, 빨리 먹을 겸 해서 히터가 달린 테라스 석을 안내받았다.
길 가의 자리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한 겨울 야외 테이블은 인기가 없을 줄 알았더니 내가 앉은 뒤 나머지 자리들도 금세 차 만석이 되었다. 나는 갈릭&화이트 와인 홍합탕과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감자튀김은 시키지 않느냐는 서버의 말에 괜찮다고 했는데 웬 뜬금없는 감자튀김인가 했더니 두 개를 세트처럼 시켜먹는 것 같았다. 길을 보며 먹는 식사는 예상외로 꿀맛이었다. 혼자 여행 온 느낌도 나고 음식도 맛있고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게다가 당장 숙소로 돌아가면 만날 친구도 있다는 생각에 외롭지도 않았다. 그저 '외국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하는 나'에 취해 행복할 뿐이었다. 단점은 서버를 부르기 힘들다는 것이었지만..
숙소까지는 이제 익숙하니 걸어가기로 했다. J와 함께 걸을 때보단 길이 길게 느껴졌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J가 나를 반겼다. 고작 몇 시간 못 봤을 뿐인데도 반가웠다. 각자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J가 기념으로 사 왔다는 기라델리 초콜릿을 먹었다.
비록 둘이서 온 여행이지만 혼자 하루를 보냈더니 자유롭고 좋았다. 개인의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 J와의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다. 긴 여행에선 때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