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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떡 is good

LA 첫 번째 이야기

by summer



LA에 도착한 날


LA는 쓸데없이 땅이 넓은 탓에 돌고 돌아 숙소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조금 쉬다 나와 The broad 전시를 보고 한인타운에 들러 엽떡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미 기진맥진해져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도착하자마자 열어 본 창밖 LA


LA에 오면 꼭 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엽떡 먹기'였다. 'LA에서 엽떡 먹기'라니. 역시 북창동 순두부찌개의 원조, 한식 맛집 LA 답다.


J는 소문난 떡볶이 덕후이다. 쉬는 날이면 엽떡 먹게 나오라고 할 정도로 떡볶이를 좋아하는데 캐나다 유학 생활 중 완전 한국스러운 떡볶이를 못 먹은 것이 꽤 힘들었나 보다. LA 도착한 직후 J는 너무 힘들고 방에서 떡볶이나 먹고 싶다며 우버 이츠를 다운받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hollywood st 근처에 숙소를 잡았는데 운이 좋게도 엽떡 배달 지역에 포함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 온 지 2주 만에 떡볶이를 두 번이나 먹게 되었다.(한 번은 포틀랜드 분식집이었다.) 딱 2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에 왔으면 외국음식을 먹어야지 한식을 왜 먹어?'라면서 억지로 파스타를 먹던 나였는데, 그 짧은 시간도 세월이라고 외국에서 갈비탕을 외치고 있는 나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무튼 LA에서 엽떡은 꽤 유명하다. 여행 온 한국인들은 필수코스처럼 엽떡(혹은 북창동 순두부찌개)을 먹고 간다. LA 한인타운은 미국 내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라 특히나 한국 음식들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어느 날은 J가 명량 핫도그도 사다 줬다.) 그중 엽떡이 유명한 이유는 한국의 맛을 가장 비슷하게 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한국 엽떡보다 맛있다는 후기에 약간 기대를 했다. 우버 이츠로 주문한 엽떡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오래 걸릴 줄 알고 마트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도착 10분 전이라는 메시지를 받고 급하게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엽떡에 넓적 당면, 소시지를 추가하고 컵밥과 주먹밥, 튀김 세트를 시켰다. 둘이 먹기엔 푸짐했지만 J는 언제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먹고 싶은 건 다 추가하라고 했다. 한국과 같이 플라스틱 뚜껑에 덮여온 엽떡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마트에 물을 사러 간 J를 기다리며 세팅하는데 내 나라에서 본 그 모습과 너무 똑같아 괜히 한국 생각이 났다. 미국에서 '동대문 엽기떡볶이'라고 쓰여있는 일회용 젓가락을 뜯게 되다니.



J가 오고 우리는 떡볶이 시간을 가졌다. 양이 워낙 많아 이틀은 먹을 거리고 예상했는데 예상과 같이 다음날, 다다음날까지도 전자레인지에 떡볶이를 돌려먹었다.


LA 엽떡은 한국처럼 매웠다. 나는 매운 음식을 굉장히 못 먹는 편인데 기억으로는 꽤 매웠던 것 같다. 외국에서 먹는 매운 떡볶이란.. 소시지는 또 왜 이리 비싼가 했더니 육즙이 나오는 미국 소시지였다. 한상 가득 펼쳐놓고 땀 흘려가며 떡볶이를 먹는데 이게 LA인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야자실인지 헷갈리는 모습이었다. 아쉬운 점은 배달을 멀리서 오다 보니 당면이 떡볶이 양념을 먹어 국물이 없는 엽떡이었다는 것과 주먹밥에 간이 안되어 밍밍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느낌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한식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한국 엽떡보다 맛있다고 후기를 남긴 사람들은 아무래도 한국음식이 많이 그리워 혀가 오작동을 한 것 같다.


LA에서 엽떡 배달시켜먹기는 대성공이었다. 21살 여행 초짜 시절엔 꿈도 못 꿨을 일이다. 데이터 유심을 살 줄도 몰랐던 우리가 어느새 커서 외국에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다니. 안락하고 편안한 저녁이었다. 배달 팁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어차피 택시를 타고 한인타운에 가는 가격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아주 합리적인 투자였다. 이렇게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하나 더 터득했다. 이러다 나중에 뉴욕에 가서도 숙소에서 맥도널드나 시켜먹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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