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
세 번째 도시로 이동한다. 스페인의 남부 관광지로 유명한 세비야. 스페인도 그렇고, 이탈리아도 그렇고 남부가 따땃해서 인기가 많은 가보다. 두 나라의 남부는 어떻게 다를지 기대가 되기도 하고. 지금은 바르셀로나에서 시골 쪽으로 점점 내려가는 중이다.
그라나다도 새로운 경험이었으나, 세비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일단 무지하게 따뜻하고, 전체적인 느낌이 내가 사는 청주 같다. 터미널도 작고, 공항도 작다. 그리고 휠체어와 자전거 도로가 잘 돼있다.
사실 세비야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동하는 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1박 2일을 위해 28인치 캐리어와 백팩을 들고 바리바리 바리스타처럼 움직여야 했기 때문. 20인치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쿨가이들을 보면 가방을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무슨 짐이 들었을지 몰라도…
저렴이 여행을 추구하는 우리는 지금까지 이동하는 동안 택시를 한번 타본 적이 없다. 물론 일주일이지만 세 도시를 여행하면서 늘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이것도 점점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대중교통도 은근 탈 만하다. 게다가 세비야는 작은 도시라서 웬만하면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처음으로 전용 화장실이 딸린 숙소에 머무른다. 세면대 물이 아주 느리게 빠지는 것 말고는 너무 깨끗하고 냄새도 좋았다. 전용 화장실만으로도 이렇게 벅찰 수 있다니. 우리 집 화장실보다 깨끗했다. 방에 전자레인지와 에스프레소 머신도 있다. 둘 중 무엇도 쓰지는 않았지만 보고만 있어도 풍족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놀 수 있는 시간은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니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스페인 어딜 가나 있는 대성당부터 시작해서 알카사르, 세비야 대학, 스페인 광장을 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알카사르 입구가 없다. 성벽을 한참 돌아 아주 예쁜 건축물을 발견하고는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다. 알카사르인 줄 알았는데, 다시 세비야 대성당이었다. 결국 성벽만 둘러보고 포기하기로 한다. 알함브라 궁전에 비하면 오두막 정도겠지.
바르셀로나 자라에서 산 민소매 원피스를 입을 수 있을 만큼 따땃한 도시였다. 낮에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코트를 입을 날씨다. 그만큼 다채로운 곳이라고 하자. 사실 세비야로 이동하면서 이 여행의 특별하지 않음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 보니 오히려 조금 막막해져서, 이건 부산 여행 정도라고. 도시와 대륙을 옮겨 다니는 것도 부산이나 제주도 여행쯤 된다고 자꾸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의 여행 부작용인가 보다.
가끔은 다시 한국에 돌아갔을 때 겪게 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구경하고 길 찾느라 바쁠 때를 제외하고,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거나 혼자 있을 때. 늘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고 소리를 지르며 반가워하겠지. 남자친구를 껴안고 방방 뛰겠지. 더 이상 지나가는 한국인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지는 않겠지. 길거리에 앉은 사람들과 올라~ 하고 눈웃음을 짓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조금은 경직된 표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곳에서 내 표정이 얼마나 무채색인지 자주 실감한다. 디폴트 값이 진지한 상인 내게 스페인 사람들은 얼마나 다채로운 표정을 선사하는지. 그들의 감정선과 여유와 농담이 자꾸 나를 편안하게 한다. 자동차를 멈춰 주고, 길을 비켜주고, 길을 알려주고, 서툰 한국말을 건네주는 사람들. 식당 서버들도 무지 행복해 보이는 곳이다. 그러니 나도 조금은 얼굴을 풀어주는 연습을 한다.
세비야에서는 스페인 광장을 무조건 봐야 한다. 우리는 체크인을 꽤 늦게 했기 때문에 야경만 봤지만, 낮에 보면 또 다른 느낌일 것 같다. 그야말로 광장이긴 한데, 마차도 돌아다니고 카약처럼 배도 타볼 수 있다. 물론 관광값이라 비싸겠지만. 우리는 돈 없어서 그런 거 안 탄다. 그냥 발로 뛴다.
스페인은 어쩐지 조명이 붉다. 그래서 포근하고 야경이 기가 막힌다. 이곳 스페인 광장도 그랬다. 고풍스럽고 유럽스러운 건축물에 둘러싸여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시간이 많다는 핑계를 대고 저녁 먹기를 미루면서도 앉아있을 만하다. 우리도 이제 스페인 사람처럼 저녁을 8-9시는 돼야 먹는다. 스페인의 밥시간에 적응해 버린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미 몸은 따라가 있다.
세비야에서 유명한 게 투우하고 플라멩코 공연인데, 보통은 돈을 내고 보지만 스페인 광장에서 버스킹을 볼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투우 말고 플라멩코 공연이다. 우리는 그들의 예술 정신에 운을 맡기기로 했다. 어디서든 버스킹을 하는 스페인의 열정을 따라서. 다행히도 플라멩코 공연을 눈앞에서 직관했다. 화려한 옷과 소리와 노래와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언젠가 훌라를 배우고 싶었는데 플라멩코도 추가해야 하나.
9시가 되어서야 저녁을 먹기 시작하고, 숙소에 돌아오니 11시가 훌쩍 넘었다. 세비야 지쿠터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다. 강변을 따라 많은 커플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야경과 함께 저물지 않는 세비야에서 신혼여행을 한다면 딱일 것 같다고 생각한다. 따뜻하고 붉고 정열적인 세비야는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제 스페인도 안녕이다. 언젠가 꼭 돌아올 것.
그라시아스. 다음은 로마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