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8
미국드라마인 모던패밀리의 주인공, 헤일리는 친구들과 놀 때 ‘몰’에 간다고 말한다. 몰이라고 한다면 쇼핑몰일 텐데, 거기서 뭘하지. 우리는 청주 시내 성안길에 익숙해져있던 탓에 길거리 쇼핑이 더 편한 사람들인데. 스플리트에도 두 개의 쇼핑몰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조금 더 작은 크기의 몰에 가보기로 한다. 시내와 더 가깝고 접근성도 좋기 때문이다. 이름도 귀엽다. 조커몰.
혹시나 스플리트 주민들도 안 가는 죽은 몰일까봐 조금 걱정했는데, 가보니 사람도 아주 많고 쇼핑할 만한 곳들도 아주 많았다. 일주일 동안 집에서 쉬다가 연달아 이틀째 시내에 나오는 중이다. 정신없이 활기차고 즐겁지만 집의 안락함이 조금 그립기도 하다. 잔뜩 쉬다가 나왔는데도 그렇다. 이제 여기 집이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인가.
지금까지 각국의 자라를 구경하면서 많은 것들을 찜해뒀다. 특히 얼룩말 패턴의 슬리퍼… 적잖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럴 수록 괜히 반항 심리로 더 사고 싶어지는 구부러진 마음. 심지어 나의 친친들은 내게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긍정했지만 그 외 모든 사람들이 말리고 말았다. 어느 쪽이든 나를 위하는 마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얼룩말 슬리퍼에 5만원을 투자할 마음까지는 없으므로 내려놓고 왔다.
조커몰에는 자라가 없지만 아주 가성비 좋은 상점들이 즐비해있다. 가성비 하면 눈이 돌아가는 내게 꼭 필요한 곳들이었다. 그곳들을 샅샅이 구경하기 전에 먼저 커피를 한잔 마시기로 한다. 나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현아는 회의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의 오후 5시는 오빠의 퇴근시간이기 때문에 어디든 5시가 되면 자리를 잡고 앉게 된다. 내가 그렇게 만든다.
틈을 낸 시간 동안 우리는 잠시 크로아티아가 아닌 한국이 된다. 나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오빠와 통화하고, 통화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주 바삐 이동해야 하는 때가 아닌 이상 꼭 이 시간을 지켜는 편이다. 하루에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시간이므로. 오빠는 퇴근하면 맛있는 걸 먹고 잠에 들 것이고, 그러면 나는 오빠가 잠든 한국의 새벽이자 크로아티아의 저녁 시간을 홀로 보내야 한다. 그래서 내게는 저녁 이후가 정서적으로 가장 심심한 시간이다.
일단 케이크를 먹기로 한다. 유럽은 피스타치오로 된 디저트나 빵이 많은데, 여기서 그 참맛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케이크도 피스타치오로 골랐다. 우리의 소비 중 조금 비싼 편에 속하지만 그만큼 아주 달고 강력한 맛이었다. 한국의 부드러운 케이크와는 다른 쫀쫀한 떡케이크 같은 식감이었다. 그냥 빵이 아닌 케이크를 먹고 있으려니 한국의 수많은 디저트 카페들이 생각났다. 그곳에서 보냈던 안온하고 생산적인 날들이 떠올랐다.
거의 매일 카페를 다니던 사람으로서 카페는 오후 시간에 딱 적합한 곳이다. 나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 외의 딴짓들을 모두 하는 편인데, 시간이 얼마나 잘 가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음료를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공간을 빌리고 싶은데 음료도 주면 감사하죠, 하는 느낌인 것 같다. 그래도 음료를 고르는 일은 중요하니까 신중하게 한다. 커피라면 모든 종류를 좋아하는 편이다.
집앞에 자주 가던 에스프레소 바가 있다. 아주 작은 곳이라 네 종류의 테이블 중에 골라 앉아야 하는데, 어디를 앉든 사장님과 상당히 가까워서 조금 불편하긴 하다. 내가 가만히 음료만 먹고 나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방에서 패드도 꺼내고, 키보드도 꺼내고, 가끔은 헤드셋까지 꺼내면 내가 과연 몇 시간을 여기 앉아있을지 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사장님은 나보다 더 모호한 짐작을 할 것이다.
어쨌든 스플리트의 조커몰에도 층마다 카페가 있다. 1층엔 맥카페, 2층부터는 모르는 브랜드. 우리는 그 중 디저트가 가장 화려한 곳을 골랐다. 거품을 아주 잔뜩 올려준 카푸치노도 마셨다. 나는 아무래도 거품이 거의 없는 커피가 좋은 것 같다. 아주 얇게 얹혀있어서 커피와 함께 호로록 마시기 좋은 커피를 선호한다. 주로 이탈리아 카푸치노들이 그랬다.
오빠와 통화하고 유튜브를 보다 보니 저녁 시간이 됐다. 우리는 아직 보지 못한 층부터 공략하기로 한다. 먼저 구매한 건 집에서 신을 슬리퍼. 3유로길래 냅다 사이즈를 찾아냈다. 아주 저렴한 퀄리티지만 그보다 더 저렴한 가격이니까 만족하기로 했다. 집에 와서 신어보니 발을 겨우 꾸겨 넣을 사이즈지만, 폭신하니 유럽 바닥에 딱 좋다. 여기서도 맨발로 다니고 싶지만 너무 차갑고 딱딱하고 아프다.
다음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들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30대 남성, 20대 여성들, 0-9세 아기까지. 사주고 싶은 게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른다. 그만큼 충분한 돈이 없다는 게 조금 슬펐지만 그래도 내 물건을 사는 것만큼 기뻤으니 됐다. 아주 좋은 가격에 아주 적합한 것들을 담았다. 어떤 물건을 보고 어떤 사람이 바로 떠오른다는 게 신기했다. 잠시 그 애들의 눈을 빌려서 골라왔다.
여러 선물들을 구매하고 나니 배가 고팠다. 사실 케이크를 먹기 전부터 배는 계속 고팠다. 요즘은 배가 고프면 자꾸 손이 떨리던데, 늙어서 그런가. 아니면 쌀이 아니라 밀을 자꾸 먹어서 그런가. 아무튼 이제 쌀이 필요한 건 확실했다. 차이니즈 푸드라는 직관적인 이름을 가진 중식당에 가기로 했다. 저렴하고 양이 많은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국식 중식이 아니라 아메리칸 차이니즈였다. 간장을 태운 양념의 볶음면, 볶음밥, 덮밥 같은 음식들.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했다. 오랜만에 하는 외식인데, 그것도 중식이라니. 계란과 치킨이 들어간 볶음면과, 소고기와 머쉬룸과 뱀부로 맛을 낸 덮밥을 주문했다. 두 음식 모두 끝장나게 맛있었다. 짭짤하고 든든한, 오래 지속될 포만감을 맛보고 왔다.
이대로 집에 가기는 조금 아쉬워서 1층, 아니 0층의 맥도날드에서 소프트콘을 하나 땡기기로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여러 외국인들이 아주 외국인인 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곤 했다. 하필 투명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으니 진짜 원숭이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우리도 너희 신기하거든, 이라고 한국어로 외치면서 내려왔다. 그 사람들은 길을 가면서 우리를 두 번이나 돌아봤다.
크로아티아에서도 맥도날드는 인기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소프트콘을 두개 주문했다. 우리나라 롯데리아와 너무 비슷한 맛이라서 기뻤다.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게 혀를 낼름거리며 열정적으로 먹는 모습은 한국에서나 여기서나 조금 얌생이 같다. 그치만 너무 맛있으니까 그런 건 그냥 모른척하기로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뒷 자리에 앉은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크고 앞머리가 잘 어울리는 보스니아 아이였다. 그녀는 우리를 계속 쳐다보면서 웃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때로는 아이스크림을 향했고 때로는 우리를 향했다. 누가 봐도 우리를 좋아하길래 두 유 라이크 어스? 하고 물었는데, 냉큼 예스라고 했다. 그래서 와아이 하고 길게 늘어뜨려 물어보니, 우리가 영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는 또~ 하면서 유 아 뷰리풀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어서 물어봤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모르는 나라인 코레아 언니들이 조금 주책이라서 미안해. 가본 적도 없는 나라인 보스니아의 아기에게 뷰리풀이라는 말을 듣는 게 황홀했다. 네가 그 말을 해주기를 바라면서도 실제로 듣고 보니 네가 훨씬 예뻐서 미안해. 우리가 아마 살면서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여행하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는 이 정도의 만남과 이별을 겪어야만 한다. 만나서 기쁘고 헤어져서 아쉬운, 그러나 그 정도면 충분한 시간들이지 않나. 이름을 들어도 집에 가면 금세 잊어버리고 말 사람들. 그래도 사진에 남기면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들이 잊어도 될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게 아득하면서도 가벼워서 좋다. 그들도 내게 그런 사람이듯이.
결국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생각한다. 곁에 있든 없든 항상 내 머릿속을 맴도는 사람들. 디지털 세계 속에서는 매일매일 잔뜩 얽혀있는 사람들. 그들과 카톡을 주고 받고 가끔은 전화를 하고 영상통화도 하면서 새로운 힘을 받는다. 그 사람들로 인해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당신들 덕분에 하루가 잔뜩 행복해졌다고, 가끔은 말로 하고 주로 혼자 생각한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어째서 시간이 갈수록 더 보고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