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부끄럽고 그뿐이야

크로아티아 10

by 최열음

하루 동안 브이로그 영상을 찍어보기로 했다. 예전에 잠시동안 운영하던 계정이 있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다시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이 왜 이렇게 쉬울까. 어젯밤에는 소설을 쓸지 말지 아주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했는데, 하루만에 소설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튜브를 한번 해볼까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 제법 어이없다.


이번 일년은 갭이어로 지정했다. 혼자서 그렇게 정했다. 재수하고 휴학도 한번 안 했던 나니까, 졸업을 했으니 1년 정도는 쉬어갈 텀을 주고 싶었다. 아주 잘한 선택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요상한 기회주의에 휩싸여 있다. 기회주의를 이럴 때 써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무튼 확실한 것은 지금 시간이 나의 기회 자체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행을 부지런히 다닐 때 말고, 지금처럼 한달을 내리 쉴 때는 요모조모 많은 것들을 하면서도 끝장나게 휴식하고 싶다. 휴식하듯 일을 하고 싶다. 에세이는 당연한 거고 소설을 배워보고 싶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잠정 보류했다. 어이없게도 하루 만에 조금 미루고 싶다는 결론이 나왔다. 유튜브 강의를 보면서 어설프게 따라하기에는 아주 잘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중에 제대로 배워볼 계획이다.


이곳 침대나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나의 옛 영상들까지 둘러보았다. 제주도로 여행을 갔던 날, 오빠와 고기를 먹던 날, 친구들과 카페를 가던 날, 그런 일상적인 날들이 담겨있는 내 유튜브를 보면서 지금만큼 영상에 담기 괜찮은 때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은 여행을 오면서 유튜브를 할지도 잠시 고민했었는데, 글쓰기가 주목적이었던지라 살포시 포기했던 것이다. 글쓰는 데 방해가 될까봐.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방해를 좀 받을 필요가 있다.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나면 점심인데, 점심이면 하루의 공식 일과가 끝난다는 소리다. 유튜브가 귀찮기는 하지만 찍을 때나 편집할 때나 재밌기는 했다. 나는 지금 재밌는 일을 유쾌한 마음으로 하고 싶으니까, 딱 하루만 한번 찍어보기로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카메라를 켰다. 지루하고 평화로운 나의 일상이 녹화되고 있다.


오랜만에 카메라를 켜니까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는데 분명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현아와 조용한 한달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큰소리로 말할 일도 딱히 없었다. 말을 하기보다는 말을 쌓아두는 시간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입을 좀 열어야할 때인가. 나를 노출하는 일이 왜 이렇게 쉽고 재밌는가. 글로도 아주 활짝 열어둔 나의 삶이 이제 영상으로까지 비치게 생겼다. 꽤 투명한 관종의 삶인 것 같다.


미칠 듯이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 옆에서 타자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 나를 다 드러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이렇게 무언가를 시작하고 관두는 일에 수치심도 없어서 어쩌지. 조금 부끄럽고 그만인 게 인생인가. 지금까지 과감히 시도했다가 과감히 실패한 것들이 무수히 많다. 스무 살 이후로만 생각해보면 토익, 컴활, 토플, 포토샵, 오픽, 한국어, 스페인어, 유튜브, 아주 많은 운동들.


운동만 해도 요가, 필라테스, 조깅, 수영, 파워댄스, 홈트. 그래도 다이어트는 한번 성공했으니 천만다행이다. 물론 시도를 많이 하는 만큼 실패한 것도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얻어걸려 성공한 것들도 있기야 하다. 성공이라기보다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들. 섣부르게 포기하기엔 아주 아끼는 것들. 브런치도 그 중 하나이다. 정말 시작하기 잘한 녀석이다.


아까 아침을 먹으면서 현아한테 내가 사춘기 같다고 말했다. 마음이 어긋나서가 아니라 지금이 너무 탐색기 같아서.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거창하게 명명해도 되려나. 코리안 갭이어를 즐기는 동안 사실 잔뜩 그러고 싶었다. 졸업 후 일년을 버리는 코리안은 아무도 없겠지만 모두에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자아와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즐겁게 일하는 자아를 찾고 싶었으니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아서 용기를 냈다.


애초에 이 여행을 시작한 것도 그 마음에서였다. 자기 자아의 신화를 막는 것은 오직 자기뿐이라는 <연금술사> 책의 말 때문이었다. 파울로 코엘료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을까. 그가 쓴 책들은 읽는 족족 나의 인생책이 되어버렸는데. 해외여행은 내 인생에 허락되지 않은 일이라고 단정하면서 열심히 대외활동해서 바로 취업하려고 했을 것이다.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무언가가 되려고 했을 것이다. 글쓰기는 높은 확률로 생업이 아니기 때문에 금세 멀어졌을 것이다. 스타벅스 일을 하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노동의 피로가 그렇게 무섭다. 많은 소중한 것들을 생략하게 한다.


7개월 동안 열심히 돈을 벌어서 행복을 미뤄두었다. 미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그 시간을 투자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미래를 위해서만 행복을 남겨두어서는 안되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그 미래에 당도해보니 과거에서 미뤄둔 만큼 미래에는 부담도 같이 온다고, 아껴둔 행복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미래에도 행복은 없다.


야금야금 행복을 찾아 먹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아주 작은 것들에 만족하는 일이 나를 자주 행복하게 한다. 하루를 얼마나 충실하게, 야무지게, 자유하게 살아냈는지. 거지같은 상황과 상사 앞에서 행복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일이 잦을 수록 나를 깎아먹게 된다. 그런 사람은 아마 행복을 유예한 미래에도 이것저것 따져가며 사치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자꾸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조금만 부끄러워하고 많이 기뻐하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빨리 시도하는 만큼 애매한 끝맺음과 실패로부터 빨리 돌아설 수도 있으니까. 결국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오랫동안 남을 테니까. 벌써 브런치에는 글이 100개 넘게 쌓여있다. 높은 확률로 이전 글을 다시 열어보지 않지만 이따금씩 들어가보면 재밌긴 하다. 매순간 삶에 진지한 내가 웃기기도 하고. 그러니까 글을 쓸 테지. 삶의 유한함과 소중함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이니까.


비록 핸드폰 용량이 별로 없어서 영상을 찍으려면 앱도 정리하고 사진도 많이 삭제해야 하지만, 시험 삼아 하루 해보는 일이니 다 해보기로 한다. 재미없으면 다시 앱 깔고 사진 지우면 된다. 여기저기 일을 떠벌리고 떵떵거리는 나지만, 조금 조용해지면 그 일을 수습하고 있는 중이겠지. 아마 내 주변인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것 같다. 나만큼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빨리 시도하고 빨리 포기할 줄 아는 애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내가 진짜 끈기 있게 덤빌 일이 무얼지 나도 궁금하니까. 평생에 걸쳐 몰두하게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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