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15
쉬는 날, 쇼핑몰에 사람이 많은 건 한국이나 크로아티아나 비슷하다. 다들 이런 날 마음껏 소비하기 위해 5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걸까. 이곳에서 여행 선물들을 한아름 안고 가는 길에 내가 고른 셔츠는 잠시 뒷전이 된다. 바르셀로나에서부터 사고 싶었던 파란 셔츠를 한달이나 미루다가 사버린 참이다. 그럼에도 내 선물 목록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게 더 만족스럽다.
오랜만에 양식이 아닌 중식을 사먹었다. 미국식 대왕 쇼핑몰 정도는 가줘야 아시안 음식을 사먹을 수 있는 곳이 스플리트다. 비록 아메리칸 차이니즈라서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은 아니지만 쌀밥에 고기, 볶음면에 야채 같은 것들을 먹고 있으면 새삼 아시안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진다. 이런 게 진짜 식사지. 중식을 양껏 먹자마자 윤택해지는 동시에 윤기가 흐른다. 기름진 입과 속을 달래려면 아주 오랜 산책을 해야할 것만 같다.
스플리트 시내는 밤이 더 생기롭다. 버스킹하던 남자가 구경하던 여자에게 이리 와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아주 부끄러워보이지만 어깨를 갸웃거리며 끝까지 노래하던 용기가 멋진 공연이었다. 그리고 다시 남자 차례가 올 무렵, 어떤 아이가 주변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를 잡기 위해 엄마는 졸졸 쫓아다니며 아이의 어깨와 목 같은 곳들을 턱 하고 잡아 올렸다. 그 큰 손에 작은 아이가 이리저리 옮겨졌다.
버스킹하던 남자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면서 루카스 하고 부르니, 주변을 맴돌던 남자아이가 달려와서 안긴다. 알고보니 아빠였던 것. 이 반전 드라마에 깜짝 놀란 나와 현아는 루카스와 아빠를 열심히 쳐다보며 웃기만 했다. 길에서 노래하는 아빠라니, 출중한 실력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저 아이는 어디서든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깡을 물려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주 배가 고플지도 모른다.
아까 쇼핑몰에서 네일을 받고 나왔다. 대낮에 했는데 밤이 되어서야 바뀐 손톱에 적응이 된다. 변화에 익숙해지려면 최소한 반나절은 필요한 건가. 글라스데코처럼 끝장나게 반짝이는 컬러로 골랐다. 나름 유럽에서만 낼 수 있는 용기였다. 아주 파랗고 아주 초록색인 손톱이 내게 어떤 대담함을 가져다줄지 궁금해졌다. 한국에서도 자주 이런 류의 용기를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으면 그만인 어떤 선택들에 있어서.
오후 나절을 실내에서 보냈지만, 과도한 햇빛을 맞은 사람처럼 조금 혼미했다. 1박 2일 여행을 다녀온 뒤에 충분히 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루 정도 텀을 두고 나왔지만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하는 동안은 정신이 계속 깨어있었기 때문일까. 몸이 쉬고 있어도 머리가 인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간만에 여행이라 에너지가 많이 축난 상태인가보다. 애초에 집에만 있으면 에너지가 비축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소모되는 것일까. 진짜 쉬는 건 집에서 쉬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진짜로 쉬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쉼이란 건 낯선 장소에서만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내게 집이란 끊임없이 영상이나 글이나 무언가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생각이란 걸 잠시 멈출 수는 없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유난히 힘이 없는 남자친구를 복돋아줄 여력이 없어서 나도 같이 다운되어버렸다. 우리 둘다 오늘은 힘이 없는 날이었구나. 각자의 집에서 함께 가라앉아보자.
이제 머지 않아 크로아티아를 떠나고 다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크로아티아에 오기 전 2주의 여행이 끝났고, 크로아티아에서 한달이 끝나가고, 이제 크로아티아 후 40일 정도가 남았다. 앞으로 한명의 친구가 더 투입될 예정이다. 내게 넉넉하지 않을 예산이 뻔히 보이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하며 선물을 고른다. 조금 대책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미룰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앞으로 빵 사먹을 돈은 있어야 하니까 개인적인 소비는 좀 줄이기로 한다. 경영학부답지 못하게 돈을 잘 못 굴리는 편이다.
이런 마인드로 어떤 회사를 들어가거나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라서, 가끔 사람인을 들여다본다. 어째서 사람을 구할 때는 정제된 언어들이 필요할까. 이러니까 자기소개서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자기를 소개하는 데 호화롭고 고급진 말들은 필요하지 않은데. 구인구직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좀 목이 막힌다.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어떤 사람이 될까. 나를 소개하는 수식어는 무엇이 될까. 결국 물음표로 시작해서 물음표로 끝나는 사람인 탐방이다.
그러나 내가 어디서 뭘 하든 그 길을 공유할 친구들이 있다는 게 새삼 기쁘다. 각자의 삶에 충실한 만큼 서로를 응원하는 애들이 있다는 게. 누군가 새로운 길을 시작하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쉬어갈 때도 우리는 카톡을 하다 전화를 하다 결국은 만나면서 쌓인 말들을 풀어낼 것이다. 이렇게 유럽까지 떨어져있어도 결국은 함께라는 게 진짜로 느껴진다면, 지금보다 멀리 떨어져있을 일은 잘 없을 테니까. 앞으로도 그 진짜인 감정들을 공유하며 살 것이다.
간만에 카페에서 아몬드 크로아상과 스몰 라떼를 먹었다. 저렴해서 더 좋은 맛이었는데, 저렴한 커피를 마실 때마다 한국의 비싼 커피들을 떠올린다. 특히 우리집앞 에스프레소바가 진짜 비쌌는데. 그 자그마한 잔에 담긴 것들이 얼마나 값졌는가. 그 에소바의 사장님이 바뀐다고 들었다. 융통성은 조금 없지만 선량한 분이셨는데 개인사정 때문에 자의로 넘기신다고 했다. 모두에게는 가늠할 수 없는 사정이란 게 있는 법이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어째서 조금씩 미워지는 걸까. 글로 먹고 살수있는 방법을 조금씩 생각해보는 요즘, 아무래도 글쓰는 사람들을 만나면 좀 답이 나올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글쓰기모임부터 시작해야겠다. 좋은 동지들을 만날 것이고, 주말은 남겨두고 싶어서 평일 알바도 어쩔 수 없이 시작하게 될 것이다. 더 좋은 글을 위해 나를 키우고 또 나를 써먹게 되겠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카페를 가서 좋은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싶다.
어쩐지 다음날에는 글을 한 자도 쓰지 않았다. 시간이 있는데도 글을 쓰지 않고 영상 편집을 하다가 큰 현타를 느꼈다. 이래서 유튜브를 시작하지 않은 거였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글을 쓰지 않았다.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는 편인데,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가만히 쉬지도 않는 주제에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꼬투리들이 잡힐 때는 다 이유가 있다. 곧 생리를 할 것 같다.
나의 눈물 버튼은 누군가의 임신과 입덧과 그래서 차려진 엄마의 밥상이다. 좋아하는 유튜버가 임신을 했는데, 그래서 입덧을 하다가 엄마밥을 먹고 감격하는 걸 보면 나는 울기 시작한다. 내게는 오지 않을 저 미래가 너무 안타깝고 서럽기 때문이다. 엄마밥은 없을 거지만 내가 먹일 아이는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금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내 목숨보다 사랑하게 될 날이 두려운데 너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미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만 없을 뿐 그 어디서도 혼자가 아닐 거라는 믿음은 있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많은 것들을 조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오늘이나 생각하기로 한다. 오늘 내가 하지 못한 것, 분명 했어야 할 것, 하지 않았어도 될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정신에 아주 해로운 생각이다. 평소라면 오늘 할 수 있었던 것, 오늘 해낸 것, 내일 해낼 것에 대해 생각하다가 잠에 들 텐데. 내게 가장 해로운 것들은 아마 내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나. 호르몬이라는 게 참 무섭다.
이 글은 아마도 숙성이 필요할 것이다. 이대로 세상에 내보냈다가는 일주일 뒤의 내가 아주 괴로워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쓰기 전보다는 쓰고 나서 괴로워하는 게 아주 낫다. 뭐라도 배출해낸 뒤에 오는 해소감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