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직의 스물 다섯
제임스의 첫 직업은 다름 아닌 디자이너였다. 그리고 그는 같은 분야로 계속 나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 어렵다는 미대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중인데도, 제임스는 생각보다 거뜬해보였다. 어떤 힘 같은 것이 그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힘에 부쳐도 자기 연민에 쉽게 빠지지 않는, 하루를 털어내고 다음날을 준비할 수 있는 건강함 같은 것이 그에게 있음을 느꼈다.
- 현재 생활에 필요한 수입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금액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필요하다면 비정규직 혹은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한 달에 월세를 제외하고 50-70만원 정도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은 일하며 모아두었던 돈을 분배해서 사용하고 있고요. 아무래도 혼자 시간을 보내다보니 돈을 쓸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술도 잘 먹지 않다보니… (어쩐지 슬퍼보임) 주 1, 2일 정도는 알바를 할 생각도 있습니다. 리프레시가 될 것도 같아서요. 그렇지만 집중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걱정되는 마음도 있어요. 졸업 전시를 마치고 나면 알바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네요.
- 혹시 알바를 한다면 진로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지, 혹은 아예 뚱딴지 같은 일도 상관 없는지. (현재 뚱딴지 같은 알바를 하고 있음)
당연히 업무와 관련이 있는 쪽에서 일하고 싶은데요. 아, 잠시 전화 좀 받을게요. 죄송합니다. (빠르게 마무리) 그런데 또 디자인 쪽으로 알바를 하게 되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럴 거면 차라리 취업을 빨리 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양면적인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 지금 모아둔 돈으로는 언제까지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분명 계획이 있을 거라고 믿음)
미리 계산을 좀 해봤는데요. 앞으로 3달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12월에 적금이 만기되거든요. 그래서 이후에는 그걸로 생활하면 될 것 같습니다.
- 어디에 가장 많이 쓰나요, 식비? (머쓱)
(웃음) 물론 식비에 많이 쓰고요. 카페도 자주 가니까요. 그 외에는 이런저런 생활비가 많이 듭니다. 장을 보거나, 휴지같은 생필품 혹은 소모품을 사야 한다거나. 생일 선물이나 경조사비도 많이 나가고요.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전시비도 필요합니다…
- 그러면 부모님의 도움은 따로 안 받고 있는 건가요?
월세 같은 경우에는 부모님과 언니가 부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 남은 올해의 시간을 내다볼 수 있나요? 계획 같은 게 있는지.
올해는 학업에 집중하고, 졸업 전시도 마무리해야 하고요.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도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년부터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회사에 지원하려고요.
- 구체적으로 내년 여름에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고 싶으신가요.
내년 여름에는… 제가 지금 식단 관리를 하고 있는데요.
- 저희 방금… 불오징어 먹고 오지 않았나요. (웃음)
조용하세요. 제가 식단을 하고 있는데요. 내년 여름에는 조금 더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지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외적인 변화를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라서요. 관리의 목적도 체중 감량보다는 건강한 삶을 위한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키는 것들이 있어야 루틴한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니까요.
- 약간 무직인의 밸런스 게임을 준비했는데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려운 마음과,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마음 중 어떤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나요?
제 상태는 후자에 더 가깝고요. 당연히 전자로 가고 싶은 것 같아요. 방향성이 보이면 더 세분화된 계획을 세울 수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발판인 것 같아요.
- 요즘의 기쁨과 슬픔은 무엇인가요?
사실 대체로 무감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기쁜 일이라면, 소소하지만 아침에 이불 정리를 할 때인 것 같아요.
- (웃음) 정말 그게 기뻐요? 칼각으로 접힌 이불을 보면 좋은 건가요?
아뇨, 원하는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상쾌한 기분인 것 같아요. 이불을 탁탁 털면서 그 이불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으로요. ‘오늘도 아자아자!’ 이런 마음이에요.
- 아니, 되게 행복하고 건강하신 것 같은데요?
(웃음) 행복하기 위한 발악입니다. 그렇게라도 하루를 시작해야 괜찮은 텐션으로 쭉 보낼 수 있어서요. 그리고 제가 만든 요리를 먹을 때가 행복한 것 같아요.
- 최근에 가장 맛있게 먹은 요리가 있어요?
두부 어묵탕을 끓여 먹었는데요. 삼삼하게요. 얼큰한 어묵탕 베이스에 두부를 넣어서 먹었거든요. 비가 오는 날에 끝내주는 한 끼를 해먹은 기억이 있네요.
- 하루 중 밥에서 오는 행복이 크다고 느끼는 편인가요?
크진 않지만, 유일하게 꾸준히 가질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하루에 최소 두번 이상은 먹어야 하니까요.
요즘의 슬픔은, (멈춤) 희노애락이 별로 없는 게 오히려 슬픈 것 같아요. 무의 감정을 유지하는 게... 자극이 조금 필요한 상황이에요. 지루하달까요. 지루한데도 해야 할 건 많으니까요.
- 음…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지 않아서 지루한 거예요, 아님 하면서도 지루한 거예요?
‘너 지금 열심히 안 하니까 지루하지’에서 오는 감정과, 혼자 몰두하는 일의 특성에서 오는 지루함 모두인 것 같아요.
- 인터뷰를 마치고 집에 가면 무얼 할 계획이세요? 오늘 아버지 생신 파티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파티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하고, 가족 식사가 있습니다. 내일 아침 팀플을 위한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마 저녁을 먹고 나면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습니다.
- 곧 하게 될 졸업 전시의 주제를 물어봐도 될까요.
현대인들이 ‘건강한 개인주의’를 지향해야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내용인데요. ‘For me’를 Forme(포르메)라고 해서 나의 진정한 형태를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철학적이다 보니 산으로 가는 것도 같습니다.
- 아, 지금 프로젝트가요? 내용이 심오하다보니 구현하기에 조금 어려움이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11월에 전시를 하고 나면 일단락 될 것 같은데요. 한 달 반 정도 남은 상황입니다.
-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해보려고 하는데요. 현재 본인의 속도는 시속 몇 km라고 생각하시는지. (웃음)
감이 조금 안 오는데요… (운전 면허는 있으나 운전을 하지 않음)
- 차를 타면 보통… 200km까지 달릴 수 있다고 치고 한번 생각해봅시다. (역시 운전 면허는 있으나 운전을 하지 않음)
아, 그러면… 어린이 보호 구역 정도인 것 같아요. 한 30km 정도…
- (웃음) 정말요? 혹시 웃기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요.
(웃음) 네. 제가 요즘 슬로우 라이프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아, 정말요? 슬로우 라이프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되게 바쁘시지 않나요.
하루하루를 곱씹으면서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적당히 여유로운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하면서도 느끼시겠지만, 저도 제 마음을 잘 모르겠네요.
- 마지막으로 제임스의 현재 움직임을 수영과 비유하자면, 어떤 모양인 것 같은지… 혹시 수영을 할 줄 아시나요?
아, 해본 적 있습니다.
- 물에 못 뜨시지 않나요? (몇 번 목격한 기억이 있음)
물에 못 떠도 수영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뒤로 가는 그… 배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30km로 달리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누워서 많은 걸 보면서 천천히 움직이는 거죠. 하늘도 조금 바라보면서요.
- 평소에 하늘을 많이 바라보나요?
자주 감상에 젖는 건 아니지만, 하늘을 한 번도 보지 못하면 너무 여유가 없는 것 같으니까요. 최대한 보려고 하는 편입니다.
제임스가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건, 나쁜 일보다 좋은 일에 더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배영을 하는 그가 바라보는 하늘은 어떤 모양일지.
예상 질문을 준비했으니 어느 정도 예상되는 답변도 있었으나, 제임스는 생각보다 예상을 자주 벗어나는 사람이었다. 가장 큰 기쁨이 아침에 이불을 정리할 때라는… 그런 것.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이불을 툭툭 털어낼 그를 생각했다. 이불 정리를 잘 하지 않는 나는 어쩐지 조금 찔렸다. 내가 가질 수 있으면서도 포기한 행복을 제임스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매콤한 불오징어를 먹고 나눈 대화에는 개운한 구석이 있었다. 제임스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일단 그걸 알게 되고 나면 불도저처럼 달려갈 것 같았다. 목적지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하루를 쌓아나가는 일이 그에겐 어렵지 않을 것도 같았다. 물론 나의 짐작일 뿐이다. 오해를 풀기 위해 다른 인터뷰를 또 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꿈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인가. 투명하지 않은 속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스스로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 어쩌면 우리는 그 방법을 배우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것일지도. 어떤 가닥이라도 잡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리다 텅 빈 채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제임스는 무언가 찾고 있는 것이다. 수색 작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어디로든 튀어나갈 것이다. 선이 없는 출발 지점에서 신발끈을 동여매고 있는 제임스를 만났다.
사진 출처: https://www.musinsa.com/mz/magazine/view/90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