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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n 26. 2024

쏟아지는 여름에 부쳐


어째서 글을 쓰지 않았을까. 얼마나 좋은 글을 쓰고 싶었던 걸까. 왜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전부 일로 만들어 결국은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려는 걸까. 쓰는 건 좋은데 읽는 건 귀찮고 보는 게 편한 이유는 뭘까.


지금 기억하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하나님이 날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생각보다 자주 필요한 일이며 그래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일로써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분주한 여행을 하면서도 괜찮은 글을 썼을 때. 사람과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오빠에게 어떠한 고백을 듣거나 애들과 웃긴 얘기를 할 때. 사랑과 사람 앞에서 우스워지는 순간은 시기와 대상을 불문하고 짜릿하다.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다! 가엾은 출판인으로서 쓰는 것보다 읽는 것에 간절함을 느끼지만 아쉽게도 당장은 글을 만지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쓰는 일이 자꾸만 밀려나나. 낮에는 글을 만지고 밤에는 잘 만지기 위해 읽어야 해서. 그러나 읽는 일은 고도의 인내를 필요로 하고 나는 너무나 많고 다른 책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길을 잃는다.


무려 1년 전의 여행이 체감상 10년 전의 기억은 된 것 같다. 바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많이도 바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사진으로 대략 짐작이 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글을 읽지 않으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도 가벼워지고 싶었던 것 같은데, 즐기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자꾸만 무거워지는 미간과 입술과 어깨 때문에 자주 피곤해했던 것 같다. 그곳을 그리워할 줄은 알았지만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이거 아무래도 평생 갈 것 같다.


참 신기하게도 글을 읽지 않으니까 은유를 해석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상황이나 문장 이면에 있는 의미를 단숨에 생각하지 못한다. 빨리 한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신속할수록 좋은 일도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갈수록 센스가 떨어지는 건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더 부지런히 움직였어야 하는데 기력이 떨어져서 게으름과 타협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게으를 틈도 없는 평일 통근자, 주말 교인이지만 그럼에도 거뜬히 중요한 일들을 해낼 시간이 내게 있음을 안다.



곧 새집으로 떠난다. 얼추 필요한 물건들은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여행을 떠날 때처럼 과하게 가져갈까 경계하는 중이다. 당장은 침대와 의자, 옷걸이, 세면용품 정도만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시작은 아주 간소하게 하고 싶다. 짐이 많아지면 감당하지 못할 크기의 방이기 때문이다. 새집에 들어가 앉아있으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맨몸으로 돌아다니면서 머리카락을 이곳저곳 흘리겠지, 그리고 모두 내가 치우게 되겠지. 내 손으로 모든 걸 처리해야 하겠지. 그게 두렵고 기쁘다. 두렵게 기쁘다.


일을 시작한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6개월 전보다는 많이 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회사가 생각보다 얼렁뚱땅 흘러간다는 것도. 모두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할 뿐이라는 것도. 절차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도. 여전히 책은 나에게 낭만이지만 가장 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물성을 갖기까지 뒤를 받쳐주는 것들은 모두 나와 같은 표정 없는 노동자라는 사실, 우리는 최고의 낭만으로 포장된 제조업계 종사자라는 사실.


열음이라는 이름을 너무 잊었다. 생활이라는 게 주어지자 꿈과 도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볼품없는 남의 글을 이리 만지고 저리 쓰다듬으며 빨리 책으로 나'가'버리기를 바라는 동안 벌써 장마가 시작되었다. 곧 여름이 쏟아질 것이다. 더는 내가 가졌다고 믿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을 것, 안주하지 않을 것. 두려워도 변함없이 기뻐할 것. 나의 영혼을 꼭 나의 신께 가까이 둘 것. 그분 없이는 결코 어떤 이름도 얻을 수 없으니.



나의 글은 일과 여행과 글을 빙빙 돈다.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가고 있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주 써야 하고, 넓게 써야 한다. 조만간 다시 콘셉트를 잡은 글을 써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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