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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싶을 때 쓰는 글

by 최열음

누군가가 미워질 때 할 수 있는 마법의 기도

“저 사람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사순절을 보내는 요즘, 더더욱 유혹이 많다. 하던 일에서 도망치고 싶고, 불평하고 싶고, 사람이 슬프게 보인다. 읽고 싶은 책은 없는데 떠나고 싶은 여행만 있다. 며칠을 유럽 생각에 끙끙 앓다가 여행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갔더라면 여행이라는 우상으로 마음을 계속 갉아먹었을 것 같다.


벌써 스물일곱이다. 이십 대의 언저리에 머무른 지금 무엇을 위해 달려 왔을까?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선택한 일이 맞았을까? 10년 뒤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만 늘어간다. 17살에 했어야 할 진로 고민을 27살에 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문과의 운명인가.


요즘처럼 매일을 공들여 쌓아 올린 적이 없었다. 단언컨대 수험생 이후로 가장 열심히 살고 있다. 일하고 공부하고 교회 일하고 자소서 쓰고 (운동하고) 다시 일하고… 솔직히 거뜬하진 않지만 감사하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열의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오빠가 운동하는 나에게 종종 하는 말 “고통의 역치가 낮다”… 고통의 역치를 높이고 감사의 역치를 낮춘다면 자주, 오래 행복할 텐데.


무언가를 시작할 힘이 없던 때도 있었다. 작년 하반기에 미친듯이 바빴던 후부터였던 것 같다. 올해 초에는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그냥 에너지가 부족해서 무언가를 시작할 힘이 없었다. 시작하고 추진하는 게 내 전공인데도. 그래서 지금처럼 바쁘게 살면서도 혼탁하지 않은 정신이 반갑다. 오히려 늘어져있을 때보다 열의를 가질수록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러다 갑자기 방전되지 않도록 운동도 깔짝대고 있다.


이슬아 작가님이 예전에 언급하셨던 만화 <장송의 프리렌>을 처음 읽어 보았다. 오빠와 만화카페에서 처음 펼쳤는데 아름다운 문장이 참 많았다. 이 만화는 네 명의 전사가 모험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이젠은 고달프고 괴로운 여행을 하고 싶어? 난 말이지, 끝난 다음에 시시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즐거운 여행을 하고 싶어.“


“너희들과의 모험도 내 인생 전체에선 100분의 일도 안 돼.“

“참 재미있어. 그 100분의 1이 너를 바꾸었으니 말이야.“


“필요한 것은 각오뿐이었던 거죠. 필사적으로 쌓아올린 것은 결코 배신하지 않아요.“


우리에게는 모험이 끝나고도 계속되어야 하는 삶이 있다. 무엇보다 삶은 끝나지 않는 모험의 연속이다. 이번만 넘기면 괜찮겠지, 여기만 떠나면 끝이겠지, 생각해도 매번 새로운 이슈가 있기 마련이다. 작년에 쓴 일기를 보면 ‘뭐 이런 고민을 했나’ 싶지만 당시에는 삶이 흔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만화 속의 문장처럼, 고달프고 괴로운 여행 속으로 내 삶을 끌고 왔는지 모른다. 충분히 시시하고 재밌는 인생이 될 수 있었음에도 더 나은 것, 깊은 것, 좋아 보이는 것에 나를 가둬 놓지 않았나. 나 역시 조금은 싱거워도 웃어 넘길 수 있는 인생을 갖고 싶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 주변엔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을 아주 조금씩만 빌려와도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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