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그러니까 사실은, 담배가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휴식, 이완, 생각, 이완, 생각중지, 자기에의 집중, 혹은 탈출.”(p.217)
작년에 절친한 덕질 메이트 선생님에게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이란 책을 선물했다. 연구원 선생님의 친구인 추혜인 작가님이 쓰신 에세이집이다. 추혜인 작가님은 은평구의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 가정의학과 의사로 의원 진료와 지역 왕진을 수행하고 있다.
책에서 <담배 연기의 무게>란 에세이를 인상 깊게 읽었다. 글쓴이는 많은 흡연자의 니코틴 의존도가 생각보다 높지 않다고 말한다. 만약 니코틴 의존도가 높다면 어디서든 흡연을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직장 혹은 퇴근길 같은 특정 장소에서만 흡연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완할 시간, 일에서 조금 멀어지는 시간
= 담배를 피우는 시간
그러니깐, 흡연자는 담배 자체를 욕망하기보다 그 행위를 함으로써 얻는 휴식 욕망하는 셈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제 흡연자들을 만나면 그들이 담배를 피움으로 진짜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한다. 작가는 페미니즘 운동에 투신하던 학생 때부터 전공의 시절까지 담배를 피웠다. 그 당시 그녀에게 담배는 일종의 경고이자 무기였고 자기 방어의 수단으로 유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전문의가 되어서는 담배를 끊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담배를 끊은 건, 가정의학과 전문의씩이나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금연해야 한다고 설득할 때 내 말에 힘이 실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나 끊었을 때나, 같은 것을 욕망한 셈이다. 내 말에 적당한 힘이 실리는 것,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는 것.”(p.218)
책은 읽기 쉬웠고, 유쾌하고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작가님의 성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올바르게, 온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만이 가지는 반짝임이 책에 가득했다. 날카로움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누군가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닌 함께 장애물을 넘는 정말 강인한 사람들.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손을 잡고 시작한 의료협동조합은 이제 3,200명이 넘는 조합원과 함께하는 지역 공동체가 되었다.
살다 보니 신념은 희미해지기 쉽고, 그런 신념을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내는 것은 더욱이 힘든 일인 걸 깨달았다. 학부 시절 가치 있게 여겼던 신념들은 사회생활을 하며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렇게 신념이 사라진 자리는 나에 관한 끊임없는 몰입만 남아있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 근사한 취향을 가지는 것, 그것을 공유하는 것, 얕은 지식을 뽐내는 것. 이런 것들이 20대 후반을 가득히 채웠다.
물론 나에게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개인의 영역에서 대화의 희열을 느끼고 관계의 안정감을 찾았다. 하지만 이것들이 나의 거의 전부가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기호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이 근사함과 거리가 멀며 오히려 빈곤함에 가까움을 느낀다.
사회운동을 하고 싶다거나, 대단한 업적을 이룰 생각도 없고 깜냥도 안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매몰되었던 삶과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라도 이웃과 나누는 게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사회에 이바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겠다. 나의 30대는 또 새로운 삶의 형식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