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 나는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

방황의 시간

by 행복한 요리사

나는 어렸을 적부터 뭐든 하면 열심이었다. 부모님한테 공부 좀 해라든가, 성적이 왜 이러냐 하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뭐든 하면 항상 열심히 했기 때문에 혼내거나 재촉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듣고 말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남달랐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중학교 삼 년치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다 외웠고, 영어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졸라서는 새벽 6시에 영어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는 제일 먼저 등교하는 사람이 나였다. 그렇게 영어를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외국어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은 꿈이 생겼다. 그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서 외고로 진학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전교에 공부 제일 잘하는 한두 명이 갈까 말까였다. 전교 1등도 2등도 아닌 내가 외고에 합격했다는 소식에 많은 선생님들이 놀랐다.

외고에 갔더니 영어는 기본이었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입학 초기에 엄마 앞에서 많이 울었다.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고 안 되는 것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네 시간씩 자면서 독하게 공부를 해도 내가 원하는 만큼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논술 즉 글을 써서 대학을 가는 선배들, 일명 수시에 합격한 선배들 소식을 접했다. 머리가 번뜩했다. 관심이 없는 여러 과목들을 한꺼번에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는 맞지 않았고 수능 공부보다는 글을 쓰는 게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담임 선생님에게 "저는 수능을 안 볼래요. 글 써서 수시 전형으로 대학가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선생님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친구들도 신기한 듯 바라봤다. 지금도 그러하듯 당시에도 타인의 시선에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수능공부를 하는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나는 원고지를 꺼내 놓고 글을 썼다. 부모님은 군말 없이 나의 결정을 응원해 주셨고 스스로를 믿고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한 번 쓴 글을 열 번, 열다섯 번도 고쳐 썼다. 안 힘들었다면 거짓말이지만 고칠 때마다 나아지는 나의 글을 보는 게 수능 공부보다는 훨씬 재미 었었다.

나의 고군분투는 빛을 발했고 논술로 원하던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아, 나는 내가 원하는 대학만 가면 모든 게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대학은 그저 인생의 작은 점에 불과한 줄을 몰랐다. 대학에 가서도 열심이었다. 과외를 뛰며 돈을 벌면서도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아 장학금도 탔다. 친구들이 초롱이 보기 참 어렵다는 말을 할 정도로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조기 졸업의 기회가 왔고 이때부터 내 고민은 시작되었다.

'나는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

공부만 열심히 한 나였기에 정작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일단 관심 있는 여러 직업을 후보에 올려놓고, 하나씩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 첫 번째 직업은 방송국 PD였다. 이중전공이 언론학이었고 PD였던 교수님이 방학 동안 방송국에서 보조 작가로 일하고 싶은 사람을 지원받았다. 자진해서 몇 주간 방송국에 있으면서 그 꿈을 접었다. 편집하다가 며칠을 집에 못 가는 일이 허다했고 무엇보다 피곤에 절어 있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며 그런 미래를 원치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일을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거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두 번째 직업은 통역사였다. 통역 관련 책도 많이 봤고 통번역 학원을 등록해서 다녔다. 실제 통역가가 어떤 훈련을 하는지 직접 체험을 해보니 이건 언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대한 상식을 고도로 요했고 학원에는 외국에서 살다 온 학생을 포함한 엄청난 능력자들이 있었다. 이건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것 같았다.

세 번째 직업은 요가 지도사였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나도 놀랍다.) 수능을 보지 않고 수시전형으로 대학을 가면 수능을 보는 친구들보다 몇 개월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하루 종일 앉아서 공부하며 찐 살을 빼겠다는 마음으로 그 기간 동안 매일 요가를 다녔다.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이 좋았고 처음에 안되던 동작이 하면 할수록 유연해지는 것도 신기했다. 그 매력에 빠져 요가 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자취방에 매트를 깔고 요가를 하거나 요가원을 다녔던 때도 있었기에 지도사는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취미로 좋았을 뿐 직업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열정적이진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유명한 어학 출판사의 신입채용 공고를 보았다. 일단 곧 졸업을 하니 지원이나 한번 해보자 하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최종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덜컥 합격해 버렸다. 출판사에서도 나는 열심히 일했다. 사회에 나가서 처음 가지는 '내 일'이었고 나는 내 이름을 걸고 했다. 퇴근 후나 주말에도 일을 싸들고 와 집에서도 일했다. 그래서 그런지 주어지는 업무가 점점 많아졌다. 업무가 많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출근할 때마다 공허하게 콩나물시루 속 콩나물 한 개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되돌아보니 나는 그 당시 우울증 비슷한 것을 앓았던 것 같다. 퇴근하고 텅 빈 반지하 방에 혼자 쪼그려 앉아 우는 날이 많았고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억울했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출판사는 지금도 유명하지만 15년 전 당시에도 유명한 곳이었고 신입치고 급여도 꽤 좋은 편이었기에 상사분들, 직장동료들 그리고 친구들이 적잖이 놀랐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게 가장 어려웠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나는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얘기했던 게 아직 머릿속에 생생하다. 부모님은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부모님의 믿음이 당연한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라면 당시 부모님처럼 '그래, 네 뜻대로 하려무나'하지 못했을 것 같다.)

퇴사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반면 견디기 힘든 일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많이 생각해 본 시기였다. 내 고민의 포인트는 달라졌다.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나는 뭘 할 때 가장 행복한가'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