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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리사에게도 영어가 필요할까요? 네!

언어의 중요성

by 행복한 요리사

CIA에는 한국 학생들이 꽤 있었다. 조리 고등학교 또는 조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온 분들도 계셨고, 나처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나이 연령대의 폭도 넓었고 칼질이나 요리 실력도 천차만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번쩍번쩍한 칼을 (알 수 없는 일본 한자도 쓰여있고 물고기 비늘 모양의 무늬도 있었다.) 소유한 학생을 만나면 '나는 집에서 쓰는 식칼밖에 안 써봤는데' 하는 생각에 괜히 위축되었다. 양파를 칼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르게 사사삭 썰어내는 사람을 보면 '와 저분은 경력이 좀 있으신가 보다'하는 마음에 나는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꿔먹는다. 고수는 장비 탓을 하지 않는 법! 나도 꾸준히 연습하면 저 정도 칼질은 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양파나 감자를 조금 챙겨 와서 기숙사의 공용키친이나 내 책상 위에서 칼질을 연습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실력의 격차는 조금씩 줄어드는 반면 학습의 격차가 났다. CIA에서 진행되는 모든 수업은 당연히 외국인 셰프님들이 영어로 진행한다. 영어로 읽고 듣고 이해하고 노트하고 질문하는 게 원활하지 않으면 수업을 백 프로 흡수하기 어렵다. 조리 관련 학교를 나온 분들의 대부분이 실습에 중점을 둔 수업을 들어왔다 보니 영어 공부를 미처 열심히 하지 못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영어가 잘 안 되니 수업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자연스레 수업에 흥미가 떨어지는 경우도 보았다. 반면 나는 요리와는 전혀 다른 전공과 직업을 가졌었기에 주방에서의 실전 스킬은 떨어졌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영어를 좋아했고 영문학과를 나오다 보니 CIA에 오기 전에도 영어로 수업을 듣는 것은 빈번했기에 영어로 된 강의에 나름 익숙했다. 그런 나에게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다. 정정하겠다. 어려움이 있었다. 다양한 지도 셰프님들이 있다 보니 (우리말에도 사투리가 있듯이) 억양이 가지각색이었고 어떤 교수님의 말은 정말 알아듣기 힘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외국인 친구에게 쪼르르 가서 '아까 뭐라고 하신 거야?'하고 자주 물었다. 영어 공부를 조금 했던 나도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나보다 영어 공부가 미흡했던 한국 학생들은 수업 따라가기가 더 힘겨웠을 것 같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스위스에서 온 친구 제니퍼였다.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릴 수 있었던 것도 당연히 영어를 조금 했던 덕분이다. (먼저 인사를 잘 건네는 내 성격 덕이기도 하지만.) 당연히 그 친구들이 나보다 영어를 더 잘했기 때문에 수업을 따라가는 데에 도움도 많이 받았고 그들의 다양한 식문화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영어로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친구들과 영어로 수다를 떠니 영어 실력이 안 느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때의 영어 실력이 그립다.)

한국인 학생들이 대부분 하지 않는데 내가 CIA에서 했던 것이 있다. 바로 '아르바이트'다. 주말에는 외부의 일반인들이 CIA에 와서 요리 강좌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수업을 보조할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주말에 일을 하는 거라 시간당 페이도 꽤 좋았다. 이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은 요리 실력보다는 '정리정돈' 그리고 '영어'였다. 나는 이 아르바이트로 용돈벌이를 많이 했다. 게다가 셰프님은 요리 수업 후 남은 재료들을 쿨하게 가져가라고 하셨기에 주말 내 식사를 해결하기에 충분했다. (주중에는 학교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했지만 주말에는 사 먹거나 요리를 하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개꿀 알바였다!

전공과 직장을 버리고 요리로 방향을 돌렸을 당시, 여태껏 공부했던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익혔던 영어를 요리 공부를 하면서 백분 활용하게 될지 누가 알았나. 졸업 후 현지 업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기본적인 영어는 필수였다. 현재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외국 레시피, 외국 요리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고 가게에 오는 외국인 손님과 자연스레 대화하고 서비스를 드릴 수 있는 것도 다 열심히 배워놨던 영어 덕분이다.

가끔 손님들이나 친척 중에 중학생 자녀가 요리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이따금 꺼내신다. 조리 고등학교를 보내는 건 어떨까 하고. 적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영어를 비롯한 학업을 열심히 하고 나서 진로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을 드린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얘기해 준다. "영어 공부 열심히 하세요."

어떤 분야를 진로로 정하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 폭넓게 배우고 싶다면 영어는 빼놓을 수 없는 자산이라고 믿는다. 내 경험상 영어 실력을 갖출 때와 그렇지 못할 때에 가질 수 있는 기회의 크기는 큰 차이가 난다. 한 연예인이 방송에서 하는 얘기를 들으며 격하게 공감했던 적이 있다. 그 분은 돈을 벌 때마다 명품을 사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어 대부분을 도둑맞았단다. 그때 번쩍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훔쳐갈 수 없는 내 본연의 실력과 내면을 다져야겠다고. 내가 열심히 공부해 둔 영어 실력은 아무도 훔쳐가지 못한다.

훔쳐가지는 못하지만 안 쓰면 자연스레 퇴화하기는 한다. 해외 생활을 그만둔 지 10년이 훨씬 넘었고 가게에 오는 외국인 손님들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한정적이다 보니 현재 내 영어 실력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과 후 러닝 중에 EBS 영어 방송을 간간히 들으며 죽어가는 영어 실력에 심폐소생술을 하는 요즘이다.

여하튼 늦지 않았다. 영어 공부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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