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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처음으로 요리사가 되다

익스턴쉽으로 만난 사람들과 나.

by 행복한 요리사

CIA에서 두 학기를 보내고 나면 학교에서 벗어나 실제 업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 이 기간을 익스턴쉽(Externship)이라고 칭한다. 최소 550시간을 한 곳에서 일을 하며 경험을 쌓아야 하고, 그곳의 담당 셰프가 평가서를 써준다. 이 평가서가 그 학기의 점수가 된다. 익스턴쉽을 시작할 시간이 다가오면 어디서 일을 할지 고민하게 된다. 나도 열심히 고민했다. 어디에서 경험을 쌓으면 좋을까 하고.

그 당시 나의 관심사는 팜투테이블(farm-to-table)이었다. 레스토랑에서 쓰는 재료를 그 지역의 농장에서 받아 손님에게 제공한다는 의미인데 제철재료를 활용한 요리를 제공할 수 있고, 가장 신선할 때 식탁에 낼 수 있으며, 긴 유통 거리를 줄임으로써 에너지를 절약하는 이점이 있다. 이 콘셉트를 가진 레스토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셰프가 주방을 책임지는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우리나라에도 여성 셰프가 남성에 비해 훨씬 적지만 미국도 그런 편이었다. 주방에서 일한다는 것은 강한 체력, 많은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이 일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아서 여성 셰프가 적은 것 같기도 하다. 현실 속 여성 셰프의 삶은 어떨지도 궁금했다.

생활비가 적게 드는 것도 중요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가까운 뉴욕 시내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는데 뉴욕 시내의 집값, 식비는 어마어마해서 버는 대로 다 지출이 될 것 같았다. 뉴욕이 아닌 생활비가 좀 더 저렴한 다른 주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으고 싶었다.

학교에는 CIA졸업생 중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셰프와 학생들을 이어주는 부서가 있었는데, 담당자에게 나의 이런 조건들을 말했더니 조지아주의 '더힐 엣 세렌비 (The Hill at Serenbe)'라는 레스토랑을 소개해주었다. 이곳의 셰프와 이메일도 주고받고 영상 통화도 했는데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좋아하는 요리를 이 셰프와 함께 하면 더 즐겁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설렘도 잠시, 어디서 지낼지가 걱정이 됐다. 이 레스토랑은 조지아주의 '세렌비'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는데 이곳의 부동산에 연락을 했다. CIA 요리학교 학생이고 2달 정도 숙식을 해결할 곳을 구하고 있다고 메일을 보냈더니 자신의 집에 빈 방이 있는데 여기 와서 지내면 어떻겠냐는 회신이 왔다. 한 달에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하고 물었더니 황당한 회신이 왔다. '어차피 남는 방이고, 우리는 한국 음식을 먹어보고 싶어. 방세를 내지 않는 대신 지내면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한국 음식을 해주는 건 어때? 집에 큰 개가 두 마리 있는데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가끔 강아지 산책을 시켜줘. ' 메시지를 읽고는 생각했다. 와, 이건 너무 좋은 딜인데?!

이렇게 생판 모르는 미국인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부부에게는 딸 둘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그들 모두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가족 외식을 하면 사양을 해도 꼭 나를 데리고 갔고, 내가 좋아하는 마트에 갈 때면 늘 함께 갔다. 추수감사절과 같은 공휴일에 이웃과 모임이 있으면 항상 함께 가서 문화를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불고기, 잡채, 갈비찜, 떡볶이, 찜닭 등의 한국 음식을 해주었고 식구들은 너무나 좋아했다. 강아지들도 너무 사랑스러웠다. 사람을 잘 신뢰하지 않는 나인데도 나를 가족처럼 대해준 그들 덕에 나도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 업장에서 제대로 일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마음과 몸이 고단할 수 있었는데 따뜻한 보금자리를 준 미국 가족덕에 마음이 편안한 익스턴쉽 기간을 보냈다.

메인 셰프도 따뜻한 분이었다. 익스턴쉽 기간 중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는데 셰프가 집 앞에 티셔츠 선물을 두고는 '해피 메리크리스마스'라고 문자를 남겨 울컥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방의 여러 파트 '애피타이저(식전음식), 메인(본음식), 그릴(스테이크), 디저트, 피자'를 모두 일해볼 수 있게 많은 기회도 주었다. 내가 팜투테이블에 관심이 있는 걸 아시고는 마을 농장에 가서 같이 수확을 하고 레스토랑에 가져와 손질을 해 음식으로 내는 일련의 경험도 하게 해 주었다. 농부들의 땀과 정성으로 일군 농작물을 맛있게 요리해서 버려지는 게 없도록 하는 게 요리사의 역할이라는 깨닫음도 얻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타국의 사람이라고 소외시키지 않았고 존중해 주었다. 마지막 근무날에는 함께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앨범과 편지를 선물로 받았다. 함께 일했던 서버들, 셰프들 한 명 한 명 다 안아주었다. 우리는 다 친구였고 가족이었다.

실제 업장에 일하면서 노동강도가 올라가다 보니 손목에 무리가 왔다. 당시 그 작은 마을에 한국인 가족이 딱 하나 있었는데 남편분이 한의사였다. 오다가다 인사를 하며 지냈는데 내 손목 얘기를 전해 듣고는 몇 번이고 나를 차에 태워 본인의 한의원에 가서 침을 놔주고 치료해 주었다. 치료비를 드리려고 했는데 일절 받지 않으셨다.

이렇게 글을 쓰며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세렌비 마을 사람들이 나의 첫 요리사 인생을 돌봐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리를 해보겠다고 낯선 미국 땅에 혼자 온 한국 여자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어 준 그분들이 참 신기하다. 좋은 사람들, 소중한 인연들을 만난 나는 참 운이 좋았다. 내가 익스턴쉽을 했던 그 레스토랑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언젠가 이 마을에 돌아가 그분들께 감사했다고 말하고 싶다. 그 레스토랑에서 신랑과 한 끼 식사를 하고 셰프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감동이 벅차오르지 않을까.

첫 요리사 실전 도전기를 이 마을, 이 레스토랑에서 하면서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학교로 돌아가 부단히 연습하고 공부하면 나도 레스토랑 주방에서 내 몫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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