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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외 주방 5년, 생존기이자 성장기

불 앞에서 배운 삶의 태도.

by 행복한 요리사

익스턴쉽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다. 남은 교육과정을 완수하고 졸업 실기 시험까지 통과했다. 입학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졸업하는 순간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CIA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유학생에게 1년의 OPT(합법적으로 전공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제도) 기간이 주어진다. 이제 학교를 완전히 벗어나 사회에 나아가 요리사로서의 삶을 살아본다는 생각에 두려움도 있긴 했지만 설렘이 더 컸다.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고 1년이 지나 미국을 떠나야 하는 시기가 오자 호주,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

졸업 후 타국에서 약 5년여의 기간 동안 다양한 레스토랑, 각기각색의 사람들과 일을 해보았다. 몇 해프닝이 있었고 그 일들은 일할 업장을 선택하는 기준과 내 업장을 가졌을 때 함께 일할 사람들은 선택하는 기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을 할 때였다. 프랑스 출신 남자 수셰프(총책임 셰프 바로 아랫사람)가 있었는데 그분은 내가 오기 전부터 아랫사람들을 괴롭히는 걸로 유명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말하길 새로 들어오는 셰프들 중 하나를 콕 집어 괴롭혔고 많은 신입들이 못 견디고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그만둔 대부분이 여성 셰프였다. 그 수셰프는 이번에는 나를 콕 집었고 여태까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말도 안 되는 괴롭힘을 보여주었다. 쓸데없는 트집 잡기부터 시작하더니 끝내는 인격모독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잘못을 해서 혼이 나는 건 당연하지만 그날 그 사람의 발언과 행동은 정상을 넘어섰다. 나도 같이 화를 내면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 수셰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최대한 침착하게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나는 호텔 인사과로 갔다. A4용지 한 장 가득 그동안 있었던 인신공격 및 인종차별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서 제출했고 그날 이후 호텔은 조사를 시작했다.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힘을 보태어 증언해 주었다. (동료들은 내가 용기를 내어 호텔에 말해준 것에 고마워했다.) 호텔은 그 수셰프를 사직 처리했다.

한 업장에서는 담배 피우는 무리들과 해프닝이 있었다. 서비스가 끝나면 (주방이 마감을 하면) 다 같이 마감 청소를 한다. 그런데 흡연하는 동료들은 서비스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웠고 청소가 끝나갈 때쯤 들어와 마무리를 대충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퇴근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이 분노는 나뿐만 아니라 비흡연 동료들도 똑같이 느꼈다. 여태까지 그들에게 지적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계속 근무태만이 이어진 것이다. 한 달 정도는 참았는데 분명 개선이 필요해 보였다. 총책임 셰프에게 가서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했고, 그들에게 잘 말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혹시 내가 말을 했는데도 개선이 안되면 그때는 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마치자마자 담배를 태우러 나가는 그들에게 좀 세게 말했다.(타이르는 것은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 담배 피우는 게 벼슬이냐. 청소하는 동료들 안 보이냐. 청소하고 담배 피우러 가라."라고.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총셰프가 다가와서 살짝 나를 거들어주었고 그날 이후 그들은 청소를 하고 흡연을 하러 갔다. 하핫. 원래 있던 동료들처럼 그 상황을 묵시하면 동양인이라서 여자라서 더 얕잡아 볼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 부조리한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나는 위 해프닝들을 계기로 좋은 사람과 일하는 것 그리고 동료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일할 곳을 선택할 때 두 곳 중 고민이 된다면 돈보다는 배움과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택했다. 아무리 내가 요리를 좋아할지라도 기본적인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과 일을 하면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출근하기도 요리하기도 싫다. 내가 안 하면 누군가는 하겠지 하는 수동적인 태도도 팀워크를 해친다. A는 나의 일, B는 너의 일이니까 B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지금도 내 업장에 함께 일할 친구를 선택할 때 실력은 조금 떨어지더라고 착하고 인격적으로 갖추어진 사람, 네 일과 내 일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뽑으려고 노력한다. 업장의 모든 일은 퍼즐과 같아서 각각의 일이 잘 수행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런저런 해프닝을 겪으며 해외 경험을 쌓았지만 언제까지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 수는 없었다. 그 당시 많은 CIA 한국인 졸업생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나도 그랬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10여 년 전에는 한국 사회의 요리사에 대한 인식이 서양만큼 좋지 못했다. 이는 곧 급여와도 연결되었다. 한국의 업장에서 일을 하면 배움은 적고 노동만 할 것 같았고 서양에서는 배움의 기회도 많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작정 한국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제 해외생활을 할 수 있는 만큼 최대로 했고 타국에서의 생활도 이제는 지쳤다. 외국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한국이었다.

아직 내 가게를 하기에는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고 더 배우고 싶었다. 한국에서 요리로 내 밥벌이를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내가 일하고 싶은 곳이 없으면 어쩌지 하고 한숨이 나왔다. 여태까지 현실을 충분히 마주하며 타국서 요리 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살아남는 게 진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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