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할 거야.
나는 대학 시절 자취 생활을 하면서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가 좋아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어떻게든 돈을 조금 아껴볼까 하는 마음이 컸다. 부모님이 방세를 내주셨고 기본적인 용돈도 주셨지만 혼자 따로 나와 산다는 건 생각보다 꽤 돈이 들었다. 부족하다고 얘기하면 언제든 도움을 주셨을 부모님이지만 대학 등록금, 자취방 보증금에 월세까지 받으면서 더 달라고 얘기하는 건 염치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꽤 오랜 기간 나는 일주일을 2만 원으로 살았다. 대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경동시장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나는 2만 원을 들고 장을 보러 갔다.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시작된 시장 나들이를 나는 점점 즐기고 있었다. 지금 이 시즌에는 뭐가 시장에 나와 있으려나 하는 제철 재료 생각과 이번 주는 뭘 해 먹을까 하는 메뉴 고민마저도 행복한 고민이었고 무엇보다 식재료들 사이를 누비며 구경하는 그 자체가 나를 저절로 미소 짓게 했다. 나는 등 뒤로 매는 가방과 양손 가득 장을 봐서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여대생이 혼자 재래시장을 누비고 바리바리 장을 봐오는 모습은 그때도 흔치 않았고 과거 그 모습을 머리에 그려보니 참 웃기고 신기하다. 매번 같은 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 요리책을 보며 이것저것 만들어 먹었고 나는 점점 요리에 스며들었다.
나는 학생의 본분인 학업에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용돈을 벌려고 과외도 했고 빠지지 않은 젖살을 빼겠다고 수영과 요가도 했다. 조기 졸업을 하겠다고 다른 친구들보다 수업도 많이 듣다 보니 바쁜 대학생활을 했는데, 이렇게 바쁜 와중에 내가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백화점의 요리 강좌였다. 내 일과의 대부분은 '의무'로 채워져 있었는데, 요리를 배우러 다니고 집에서 요리 책을 보고 요리하는 순간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하고 놀랄 정도로 즐거움 그 자체였다.
졸업을 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마음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을 때에도 선뜻 퇴사하고 '나는 요리를 하겠어'하고 마음을 먹기는 쉽지 않았다. 요리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였지 직업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금까지 해온 공부와 사회생활들과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나조차도 '외고와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까지 있는데 갑자기 그만두고 완전히 다른 진로인 요리를 한다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공부들을 다 쓰레기통에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요리로 내 밥벌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
'이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즐겁게 일할 수 있을까?'
긴 고민 끝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고 스스로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너는 무슨 일을 할 때 제일 행복하고 즐거워?'
그 답은 요리였다. 요리로 진로를 돌릴 수 있었던 것은 '용기'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 덕분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후보로 있던 다양한 직업들을 몸소 해보았기에 다른 일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점도 큰 몫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요리를 하겠다고 떠났다면 주방생활에 지칠 때마다 편하게 직장생활이나 할걸 하는 한심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여하튼 요리라는 답을 찾은 후에도 내 삶이 이제 빛날 거라는 확신은 전혀 없었다. 단지 이제는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해봐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이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결연함이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디뎠고 그 당시 나의 나이가 26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그 직장에 남았다면 난 어땠을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요리를 선택해서 만난 수많은 소중한 인연들,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CIA요리학교 생활,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내 신랑,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레스토랑을 마주하지 못할 뻔했다니! 되돌아보니 요리를 선택한 건 그전의 학업과 활동을 저버리는 게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했던 영어, 대학 생활을 하며 만난 인연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헤매고 시도해 본 모든 시간들과 직장생활까지 모두 소중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학교의 짜인 수업을 듣는 것보다 훨씬 유익하고 제대로 된 인생교육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혹시 사랑하는 일을 만났음에도 망설여진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꼭 도전해보았으면 한다. 좋아하는 일, 더 잘하고 싶은 일을 마주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오는 기회는 아니며 인생의 큰 축복이다.
지금부터 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나의 요리 인생, 브런치 레스토랑 오너셰프가 되기까지의 과정, 레스토랑 운영 7년 차에 레스토랑과 집을 하나로 만든 내 건물을 갖는 순간까지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나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펼쳐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