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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Dec 12. 2016

모슬포를 떠나며

제주 올레 8 #4

항공권이 쌌던 이유 외에도 제주도를 찾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모슬포 방어입니다. 호사가의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겐 겨울철 방어 투어가 연중 위시 리스트 상위에 올라 있을 만큼 중요하게 자리매김했고, 그건 벌써 3회째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방문에 모두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매번 모슬포 방어축제 기간 즈음에 오곤 하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는 방어가 맛이 덜 들었던 기억이 있어 올해는 조금 늦춰 온다고 왔는데도 거의 축제기간을 살짝 지난 시간에 맞춰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환상적이라고 찬탄해 마지않던 길을 걸으며 느꼈던 황홀감은 모슬포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 겨울철 해 질 녘의 햇살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제철 맞아 기름기 도는 고소한 방어 한 점에 한라산 소주 한 잔 곁들여 마실 생각에 몸이 후끈 달아오릅니다. 덩달아 마음도 급해집니다.



호텔에서 내다본 모슬포항



여행을 다니면서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잠자리에 더 신경을 쓰는 관계로 오늘 묵게 될 호텔이 어떨지 걱정 반 기대 반입니다. 제주에 시설 좋고 위치 좋은 호텔들이야 많지만 비용에서 자유롭지 못한 배낭여행객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고 그만큼 더 신중하고 발품을 많이 팔아야 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알게 된  오늘 묶을 호텔도 일단은 저렴했고 신축이라 깨끗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을 끌었는데, 멀리서 보니 지난번에 왔을 때 공사 중이던 그 건물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아고다를 통해 6만 5천 원에 예약을 했다가 네이버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더 싼 가격(6만 천 원)을 제시하길래 즉시 취소하고 새로 예약한 호텔입니다.

건물 외관을 보니 일단은 신축이라 깨끗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근데 뜻밖으로 이 호텔을 더 좋아하게 만든 사건은 "죄송합니다. 아직 조식 준비가 안돼서 대신 두 분의 내일 아침 조식비 조로 만원을 돌려드리겠습니다"라는 동남아시아 출신 같은 외모를 가진 마음씨 좋아 보이는 매니저(주인아저씨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의 양심선언 때문입니다.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건 '그럼 오늘 호텔비는 5만 천 원이란 말인가!' 속으로 땡큐를 연발하며 신축건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깨끗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오니, 모든 방문들이 페인트 냄새 환기시키다고 다 열려 있습니다. 방을 들여다보니 쾌재 연발입니다. 가성비 최고입니다. 혹시나 싸게 예약하기 때문에 창도 없는 방이면 어쩌지 하는 우려를 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멋진 바다 뷰가 제공됩니다. 간단한 조리기구까지 갖춰진 호텔과 펜션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잠시 후, 중늙은이 둘 다 입을 귀에 걸고 산책 겸 오늘 행사의 2부를 시작하러  해저 물 녘의 모슬포항을 어슬렁거립니다.



가성비 최고의 모슬포항 아크로뷰 호텔. 그리고 제대로 맛이 들었던 방어.



동현식당. 몇 년 전 모슬포의 한 펜션에 묵은 적이 있는데 당시 주인 할머니가 소개해 준 회집입니다. 그 이후 가족들이랑도 오고 지금 오면 네 번째인 것 같은데... , 일요일 저녁이라 다른 회집들은 다 조용한데 이 집에만 손님들이 붐비는 걸 보니 일대에서 인정받는 집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가 만족했던 집입니다. 

올해는 방어가 많이 안 잡힌다며 서빙하는 아줌마가 너스레를 떠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난번보다 50%나 더 비쌉니다. 1인당 2만 원에 먹던걸 3만 원에 주문합니다. 방어 대가리 구이도 없습니다. 어쩌겠습니까. 

한데, 달랑 세 점이 나온 뱃살 부위의 방어 살을 한점 입에 넣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고, 특히 잡내가 없이 뒷맛이 깔끔한 21도짜리 한라산이 카스를 부르며 '마라도'를 외치는 순간 모든 것은 비현실이 됩니다. 기름이 올라 제대로 맛이 든 방어는 동행한 파마머리의 뚱뚱한 술꾼으로 하여금 '조만간 꼭 한번 더 온다' '왜 내가 진작 안 오고 이제야 왔을까'라는 항복 선언을 받고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계속 한라산을 불러댑니다. 요즘 대부분 젊은 사람들의 취향이 그런 것처럼 부산의 지역 소주들도 대부분 17도 정도의 저도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거기에 입맛과 주량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잊고 방어에 취해서 21도짜리 소주를 17도짜리와 동급으로 여기며 호기를 부리다 보니,....

거의 기절했더랍니다. 물론 기분 좋게 말입니다.




원래 아침을 간단하게 아니, 수십 년간 미숫가루로 대신 해왔기 때문에 특히 술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도 꾸역꾸역 밥을 챙겨 먹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다행히 어젯밤 같은 방에서 내 코 고는 소리 때문에 고생했을 뚱뚱이 친구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진정을 담은 감사의 인사를 어제 그 매니저에게 몇 번이나 하고 호텔을 나옵니다. 몇 시간 후에 여기를 다시 지나쳐가게 되리란 건 꿈에도 모른 채. 

방어, 한라산, 좋은 공기에다 깨끗한 잠자리까지 모든 게 다 마음에 든 탓인지 과음을 했는데도 머리가 그렇게 무겁지 않습니다. 나만큼 술꾼인 친구가 술 마신 다음날 아침의 루틴이라며, 편의점에서 다방커피맛 나는 가루커피를 조제해 주는데 맛이 기가 찹니다. 술 마신 다음날 아침 공복에 마시면 딱 좋을 그런 달콤한 추억의 커피맛입니다.



보말죽과 국수보다 한라산을 위한 햄 안주에 더 감동받았던 국수 가게



모슬포는 항구이기 때문에 당연히 배가 많습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제주의  다른 지역보다 모슬포에는 유독 면이나 국수 파는 집이 많이 보입니다. 모슬포 밀면이 유명하다고 인터넷에 소개되기도 했고, 그래서 이전에 왔을 때는 맛집 탐방의 일환으로  그 유명한 집을 찾아갔었는데, 오후 세 시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재료가 다 떨어져서 영업을 마쳤다는 안내 팻말이 걸려있는 걸 보고 망연히 돌아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이 보이는 게 '다방'입니다. 6- 70년대에나 어울릴법한 간판과 그 당시를 연상시키는 바깥 장식을 한 다방들이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느낌을 주는 동시에 또 묘한 향수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다방에서 전설로만 알고 있는 커피에 계란을 넣은 모닝커피를 마셔 본 기억은 없지만 왠지 한물간 그 '다방'들이 계속 지금 그 자리에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 자리마저 내어줘 버리면  나와는 직접 관계가 없어 어렴풋이 알고 있던 어떤  과거를,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 그것에 대한 기억이 단절될 것만 같습니다. 





모슬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평균 20분 이상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모슬포에 자주 왔다면 제주 방향이나 서귀포 방향으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서성이며 버스를 기다려야 됩니다. 내가 그런 경우인데, 그러다 보니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다방에 자연스럽게 눈이 많이 갔고 따라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버스정류장입니다. 여기 바로 못 미쳐 사거리가 있고, 항구로 진입하기 전의 나름 모슬포의 중심가 같습니다. 근데 넓고, 또 길지도  않은 길 주위로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다방 간판만 무려 다섯 개입니다. 가까이서부터 은성 다방, 모슬포 다방,  제일다방,  중앙 다방, 양지 다방 등 그 이름들도 요즘 가게들이 쓰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묵은 맛이 나는, 옛날에 전화번호부가 유일한 검색 수단이었던 시대를 주름잡던 그런 이름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에도 여자들 같으면 -자, -순, -희, 남자 같으면 -철, -식, -수 등이 흔하게 사용되던 그런 시절 말입니다.

정작 내가 보고 싶은 건 거길 드나드는 사람들과 거기서 일하는 종사자들입니다. 옛날처럼 항구라서 철마다 파시가 서고, 거칠고 험한 바다 위에서  목숨마저도 기꺼이 담보 잡힌 대가로 거머쥐게 된 두둑한 돈뭉치를 가슴에 품고, 그간의 객고를 보상받고자 호기롭게 기분을 내는 선원들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또 그런 사람들을 겨냥한 예쁘게 차려입고 진하게 립스틱 바른 다방 레지나 마담들의 맞춤 서비스도 없을 텐데, 과연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고 또 어떤 사람들이 명맥을 이어가며 그 자리들을 지키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쉽게도 그렇게 여러 번 이 자리에 서서 유심히 관찰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내 소망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다음으로 미뤄야겠습니다. 이러다가 영영 다방에 대한 내 호기심은 충족되지도  못한 채 모슬포에 못 오게 되지나 않을까.  운이 좋아 어느 날 여길 다시 찾았을 때, 그때의 다방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이름 모를 괴물같은 현대식 건물이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걸 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약간의 조바심을 안고 모슬포를 떠나는 버스에 오릅니다. 협재 가는 버스를 탑니다.



협재 해수욕장의 인어상

한림항. 여기에 비양도 가는 도선 선착장이 있습니다.



오늘은 비양도 가는 날입니다. 제주도를 어느 정도 둘러보고 나서 근해의  섬을 방문하려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는 우도, 그리고 두 번째는 마라도의  순서로 선택할 겁니다. 나 자신도 그렇게 방문을 했습니다. 사실 어젯밤을 보냈던 모슬포항에서는 마라도가 지척이기 때문에 다음날엔 보통의 경우라면 모슬포 선착장에서 마라도나, 아니면 더 가까이 있는 가파도에 가는 것이 일반적일 겁니다. 하지만 동행한 친구에게는 미안하지만 양해를 구하고 내가 두 섬을 이미 다 가봤으니 이번에는 내가 안 가본 비양도를 가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동의를 해주는 바람에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서게 된 겁니다.

비양도에 갈 요량으로 숙소도 협재 해수욕장 앞에다 잡았는데 내가 착각을 했습니다. 비양도 가는 배는 협재해수욕장이 아니라 좀 더 떨어진 한림항에서 출발한다는 걸 협재해수욕장에서 내려 물어 물어본 후에 알았습니다. 비양도 가는 배는  9시, 12시, 오후 3시  이렇게 하루 세 번 왕복을 하는데, 시간을 보니 12시 배를 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 근처에 보말죽과 국수 파는 식당이 적시에 눈에 띕니다. 국수를 좋아하는 두 중늙은이들은 자리를 잡자 오랜 고민 끝에 죽과 국수 한 그릇씩 주문합니다. 나눠먹기로 하고. 

더불어  한라산까지 한 병 시키고 나니, 괜히 흥분되고 어젯밤의 그 느낌이 스멀스멀 되살아 나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친절하신 주인아주머니는  댓바람에 소주부터 주문하곤 소주잔을 마주 대며 좋아서 입맛을 다시고, 코를 연신 실룩거리는 두 늙은이를 위해 술안주로 햄을 구워 내줍니다. 아침부터 너무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황송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조신하게 권커니 잣 커니 하다 보니 죽과 국수가 나오기도 전에 술병을 거의 다 비워버렸습니다. '흠' 마지막으로 식전에 소주를 마셔 본 적이 언제였더라, 적당히 취기가 올라 게슴츠레한 눈을 비벼가며 옛날을 더듬어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내가 알기로는 그 기억은 분명 여기 마주 보고 있는 이 뚱뚱한 친구와 함께였을 것입니다. 십중팔구. 

한 병 더!, 유혹을 뿌리치려는 그대의 노력이 가상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몸짓과 표정에서 내가 보이더이다.

한림항 가는 버스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갈등과 유혹의 억센 사슬에서 풀려납니다.

어제와 달리 눈이 부실만큼 제주의 어느 겨울날은 화창하고, 그만큼 바람도 거세게 부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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