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8 #5
한림항에 도착해 보니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동네 같습니다. 마침 소변이 급해서 뛰다시피 날다시피 달려 겨우 급한 불을 끄고 나서 느긋하게 돌아보니 그때의 기억이 조금 납니다. 그 당시 몹시 지친 상태로 올레길의 종점을 향해 걷다가 한림항에 도착하기 직전의 어느 큰길에 면한 보도를 따라 걷는데 무수히 많은 개똥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도 중앙에 그어진 노란색 실선을 중심으로 한 쪽 길에만 그 똥들이 뉘어져 있었던걸 보고 그때 동행했던 배불뚝이 친구랑 함께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광경은 사진을 찍어 뒀어야 하는 건데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아쉽습니다.
방어로 유명해서인지 모슬포항은 인지도가 높아 그 규모가 상당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 본 바로는 항구 같지 않은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여서 방어를 빼고 나면 그 명맥을 어떻게 유지하나 싶을 정도로 별로 내세울 게 없는 항구 같았습니다. 하지만 여기 한림항은 아침부터 분주하고 활기가 넘칩니다. 그래서인지 모슬포에선 별로 눈에 띄지 않던 갈매기들이 극성을 부리며 정신 사나울 정도로 시끄럽게 날아다닙니다. 그런 번잡함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우리가 할 일을 깨닫고는 비양도행 배표를 끊으러 갑니다.
근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비양도행 도선 수리 관계로 11월 말까지 도선을 운행 안 한답니다. 그럼 '섬에 사는 주민은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을 하려는 순간 표 파는 아가씨는 이미 내 속을 알고나 있다는 듯이 '단 현지 주민들만 왕래가 가능' 하다고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 없이 웃음을 띠며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비양도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누구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도,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의 일정에 약간의 차질이 생긴다는 정도입니다.
일단 사태 파악이 됐으니 재빨리 대안 마련에 들어갑니다. 먼저 차귀도를 염두에 두고 선착장에 전화를 하니 지금 바람이 심하게 불고는 있지만 배는 뜨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도선이 아니라 일정 수의 승객이 모여야만 운항이 되는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 10시 30분인데 오후 2시쯤 출항 가능 여부를 알려준다길래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남은 건 마라도 뿐입니다. 역시 전화를 해보니 모든 게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12시 50분 배가 있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마라도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순간,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돌아온 뚱뚱이 친구가 진행상황을 듣고선 놀라는 눈치입니다. 겨우 담배 한 대 피는 사이에 내가 생각해봐도 놀랄 만큼 많은 일들을 처리한데 대한 경외의 눈길을 보내면서. 그런데, 어쩝니까. 여행을 기획한 입장에서, 그리고 파마머리 한 저 친구는 술 마시고 틈만 나면 담배 필 궁리 말고는 아무 걱정도 않고 나만 믿고 있는데. 친구는 훨씬 더 좋아합니다. 내심 마라도에 가고 싶었지만 나땜에 어쩔 수 없이 비양도에 왔노라고. 그래, 나도 마라도에 한번 더 가보자. 그러면 그때 못 봤던 마라도의 숨겨진 속살을 보게 될는지 누가 압니까. 그렇게 해서 누가 주역을 맡았고, 어떤 내용으로, 언제 방영된지도 모르는 '봄날'이라는 드라마가 촬영된 장소라고 군데군데 안내 포스터를 붙이고 유혹하던 비양도를 앞에 두고 돌아섭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마라도로 향하게 됩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떠나온 그곳으로. 좋아서 싱글벙글하다 못해 귀가 입에 걸려 있는 뚱뚱이 친구와 함께.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말입니다.
순발력 있는 가이드 덕택에 일정에 차질이 생겨 플랜 2를 진행하는데도 시간적 여유가 많습니다. 어제 다 못 본 모슬포항의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며, 쓸데없이 여러 곳을 기웃거립니다. 그러다가 결국 뚱뚱이 친구는 고등어회를 먹자고 꼬드깁니다. 근데 나는 고등어회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가격 또한 장난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걸 먹게 되면 마라도의 싱싱한 해삼과 멍게, 소라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친구는 모르고 있습니다. 겨우 단념시키고 우리는 12시 50분 배를 타고 마라도로 향합니다.
마라도는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11km 떨어진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이랍니다. 옆에 있는 가파도 보다도 훨씬 작은 섬, 2015년 기준으로 인구가 137명 밖에 살지 않는 섬입니다.
어제보다 더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낸 한라산이 그 앞자락에 산방산을 품고 있는 모습은
마치 엄마가 자식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렇게 여기 제주의 동서남북 어느 곳도 한라산의 품이고, 그 앞자락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산 아래의 모든 길은 처음이 그 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슬포에는 애초부터 갈매기가 많이 살지 않는지 항구를 떠나는 배를 쫒아 오는 갈매기도 없고,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도,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는 약속도 없습니다.
길을 잃은 바람만이 재미 삼아 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뿐
철 지난 섬과 바다 주위에는 간간히 심술을 부리는 철없는 파도 외에는 모든 게 심드렁합니다.
그 길을 처음 가는 이들만이 신나고 흥분되는 모양입니다.
함께 가는 뚱뚱이 친구를 보면 압니다.
배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람도, 쫒아오는 갈매기도 없습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세차게 치면 곧 잠길 것 같은 봄날 청보리가 아름다운 가파도를 지납니다.
거기가 어디든 배에서 내릴 때마다 나는 방파제와 해삼과 소주를 생각합니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하지만 마라도의 선착장은 내가 생각했던 게으른 방파제가 아니었고, 내리려는 사람과 타려는 사람들 간의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워낙 거센 바람과 심술궂은 파도 때문에 잠시도 졸아서는 안 되는, 단지 배가 닿았다가 곧 떠나기 위한 장소일 뿐입니다.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 봤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헸더니
시는 어디에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배가 닿기도 전에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복장과 채비를 하고 완벽한 포인트에 자리 한 조사 양반.
산방산과 한라산을 옆에 두고 하는 낚시에는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라도는 워낙 작은 섬이기 때문에 천천히 걷더라도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섬을 다 둘러볼 수 있습니다. 다음번 배를 타고 섬을 나가기까지는 약 두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에, 물론 그 유명한 마라도 짜장면과 짬뽕을 한 그릇 할 시간은 충분합니다. 지난번 마라도에 왔을 때, 배에서 내리기 전에 오랫동안 고민한 게 있었습니다. 이름값도 못하고 불어 터져서 맛도 없다는 평이, 그래도 한 번은 먹어 볼만 하다는 댓글보다 훨씬 더 많은 마라도 짜장면과 짬뽕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고 이생진 시인을 생각하며 해삼에다 소주를 한잔 하기로 했는데, 그러고도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는 바람에 망설임 끝에 부랴부랴 먹은 짜장면은 예상대로였습니다. 참으로 결정하기 힘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맛도 없고 분위기에 낚이는 것이 확실한데, 그러면 안 먹는 것이 당연할 터,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온 기념인데 한번 먹어줘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속 반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여길 처음 방문하는 뚱뚱이 친구를 내 뜻대로 회유합니다. 맛이 없더라, 먹지 말자고.
잘 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내내 조용하던 섬도 배가 들어오고 나갈 때만은 분주해집니다. 바쁘게 배에서 내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섬을 돌아봅니다. 그렇게 가면 당연히 짜장면이나 짬뽕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아마도 배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서 조리된 면들은, 배에서 내리는 즉시 먹는다면 저번에 우리들처럼 배 떠나기 직전에 허겁지겁 먹을 때의 면보다는 훨씬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마라도.
여기 발을 딛고 보니 예전에는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주에, 한라산에 한번 마음을 주면 결코 그들을 벗어날 수 없고 배신할 수 없음을.
바람이 세게 불어 그만큼 더 심하게 일렁이는 억새의 몸짓도 바다가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한라산을 향하고,
사이로 난 길 역시 제주를 향해 뻗어 있습니다.
길은 단절되지 않았고 여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몰랐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온 길 잃은 바람으로 억새가 일렁거리는 것이 아님을.
억새의 몸짓에서 바람이 비롯된다는 것을.
섬을 그리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기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가 섬을 떠나 또 다른 섬으로 향할 때, 일을 마친 배들은 고기를 싣고 섬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시간에 맞추어 창망한 바다를 왼편에 두고, 등대를 올려다보며 바람을 품에 안고, 억새 일렁이는 길을 따라 걷는 황홀한 경험은 여기서 말고는 힘들듯 합니다. 운 좋게도 내가 사는 아파트도 오륙도를 내려다보고 있고, 주위에는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걷는 길도 있지만, 이 길은 어느 누가 걷더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입니다. 느낄 수 있고, 감탄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추고 있다면 말입니다.
'무인 등대로 불을 밝히기 시작해서 1955년 유인 등대가 되었다는 마라도 등대는 국토 최남단에 있는 등대로서, 세계 각국의 해도에 제주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아도 마라도 항로표지 관리소(등대)는 표기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라도 남동쪽 끝 해발 36m의 섬에서 가장 높은 해안 절벽 위에서 중국해와 제주도 남부 해역을 운항하는 선박의 육지 초인 표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외면하고 등대만을 보며 걷다 보니 길을 잃었습니다.
돌아봐도 내 걸어온 길만 보일 뿐 한라도, 제주도 보이지 않습니다.
갑자기 더 멀어진 바다 위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바다에 비해 너무도 작은,
나처럼 길을 잃은 듯한 배가 심술궂은 파도 덕에 사정없이 흔들리며 멀어집니다.
등대를 향하고 있음에도 자꾸 멀어지는 건 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억새가 위세를 부리는 마라도의 낮은 등대의 근무시간이 아닌 듯 하니 억새와 바다에 홀려 길을 잃은 나나,
등대를 지척에 둔 바다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나뭇잎 같은 배 모두
등대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여기가 끝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선수를 돌리려 하지 않는 저 턱없이 작은 배의 몸부림을 보면,
가진 것 모두를 던져버리려 작정한 한없이 외로워 보이는 저들의 뒷모습을 보면,
한라산과 제주섬이 보이지 않는 이 곳이 길이 끊어진 끝이라는 것을.
하지만,
제주의 모든 길은 처음이 그 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등대 옆에 성당이 서 있는 의미를 안다면,
여기까지 와서 이 길 위에 서 본 사람은,
길의 끝을 보고 발걸음을 돌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라도 끝자락에 서서
던져버리고, 허물어버리고,
믜리도 괴리도 업시 그렇게 담담해진 마음이 되어
또 다른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