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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Dec 22. 2016

먹으러 갔던 제주

제주 올레 8 #6

아쉽지만 더 이상 마라도를 꼼꼼하게, 구석구석 둘러볼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온 뚱뚱이 친구는 아마도 내가 과장까지 해가면서 극찬을 했던 해삼과 멍게를 안주 삼아 마실 한라산 한잔 생각 때문에 마라도에 더 솔깃했을지도 모릅니다. 나 역시도 싱싱한 데다 가격까지도 착했던 그 날의 해삼과 소라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라도의 그 유명한 짜장면과 짬뽕은 그냥 패스하더라도 해삼과 소주는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마시다가, 먹다가 마지막 배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치의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술 앞에서 이렇게 죽이 잘 맞는 친구가 또 있을까.

지난번 왔을 때 보다 지금이 더 비수기인 모양입니다. 대부분의 간이 회집들은 거의 다 문을 닫고 딱 두 군데만 혹시 모를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심리가 음식점을 선택 할 때 첫 집은 잘 안 가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두 번째 집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더 가봐도 문을 연 집이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해삼이 빠진 대신 더 풍성해진 마라도의 해물 한 접시와 소라 껍데기 깨는 외지인 중늙은이



평소와는 달리 내가 큰소리로 호기롭게 소리치며 회집에 들어섭니다. '저기 사진에 있는 3만 원짜리 같은 2만 원짜리 한  접시 주세요'. 이렇게 과감해진 건 아마도 배를 타면서 갈아 낀 선글라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냥 웃으면서, '요즘 해삼이 잘 안 잡혀서 사진처럼 그렇게 똑같이 줄 수는 없다'라고 기분 좋게 응대해 줍니다. 예전의 그날보다 더 푸짐하고 다양한 해물 한 접시가 나오기 전에 벌써 마라도 넉 잔이 게눈 감추듯 사라집니다. 뚱뚱이 친구는 소라 만원 어치 세 마리를 사서 직접 손질해 보고 싶다고 망치를 들고 소라껍데기를 깨고 있습니다. 그렇게 껍질을 깐 생소라 한 마리를 통째로 입에 넣으니 이게 무슨 맛입니까. 세 가지 맛이 동시에, 그리고 순차적으로 납니다. 소라 똥의 쿰쿰한 냄새와 속살의  고소하면서도 꼬들꼬들한 식감과 더불어 신선한 바닷냄새까지. 여태까지 맛보지 못했던 환상적인 맛과 향의 조화가 입속에서 향연을 벌이는 듯합니다. 당연히 한라산이 연회에서의 가무 역할을 합니다. 



마라도에는 선착장이 두 군데 있습니다. 모슬포에서 오는 도선의 선착장은 좌측에 있습니다. 2014. 2.



덕분에 예정에 없던 소주를 한 병 더 주문하고, 그러다 보니 놓치면 오늘은 꼼짝없이 여기 마라도에서 일박을 할 수밖에 없는 배 출발시간에 대해서도 느긋해집니다. 급기야는 주인아주머니가 지금은 일어나야 배를 탈 수 있다는 주의를 주는데도 나는 약간은 불안해하는 친구를 안심시킵니다. '내가 저번에 와봐서 아는데 아직은 좀 더 여유가 있다네' 하면서 남은 술을 기어이 다 비우고 일어서서 배를 타러 회집을 나서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이 굽이를 돌면 분명 저기 멀리 선착장이 보여야 되는데, 대신 겨울철 늦은 오후로 향해가는 언덕에 억새들만 여전히 일렁대는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내가 착각을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소라도 안 먹었고, 그 때문에 소주도 한 병만 마셨던 걸 모르고 그때와 동일한 상황으로 시간 계산을 했던 겁니다. 아까 회집 주인아주머니가 배를 안 놓치려면 일어서야 된다는 35분에는 일어섰어야 했습니다. 배를 내릴 때 안내방송에서 2시 50분에 출발하니까 2시 45분까지는 선착장에 와야 된다고 당부를 한걸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5분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40분이 좀 넘어서야 회집을 나왔던 겁니다.



가파도에서 마라도에 도착해서, 2014. 2.



갑자기 불안 해지는 건 시야에 한 사람도 들어오지 않고, 간간히 골프장 카트 같은 전동차들이 우리 앞을 지나쳐가고는 그것들 조차도 갑자기 언덕 너머로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을 때부터입니다. 뚱뚱이 친구도 낌새를 챈 듯한데, 불안해하는 표정을 내게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조금 미안하기도 해고, 친구를 안심시키고 또 흔들리는 나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도 '시간은 충분하다. 내가 조금 착각했는데 배 타는 데는 문제없다. 안되면 하루 여기서 머물고 술 한잔 진하게 하지 뭐!' 하니, 친구는 흔쾌히 맞장구를 치는데 본심은 그게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어조와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뛰는 듯한 잰걸음으로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걷는 짧은 시간 동안 겨울 마라도의 세찬 바람소리만이 볼을 때리고 귓가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는  내내 둘 다 앞만 보고 있었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저 굽이가 마지막이어야 우리가 배를 탈 수 있는데, 날다시피 걷는 내내 중얼거린 마음속의 주문이 먹혔는지 드디어 선착장이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안보입니다. 물론 배를 타기 위해서는 선착장으로 계단을 좀 걸어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이나 승객들이 선착장에서 줄을 서서 배를 기다리고 있는 광경들은 여기 이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시간은 거의 배 출발 예정 시간인 50분에서 1-2분 정도 못 미쳐 있습니다. 



지난번 제주 왔을 때 마라도에서 모슬포 들어오는 배안에서, 2014. 2. 



나도 그렇고 보통의 사람들은 말을 쉽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책임도 잘 지지 않습니다. 어떤 시간, 어떤 상황에서 하는 말들은 서로 간에 묵시적으로 그러려니 하고 상호 인정해주기도 합니다. 마라도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전날보다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기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고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면 나오는 배가 못 뜰 수도 있겠는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친구가 답합니다. '좋은 기회지.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섬에 갇혀 밤새도록 술 마시는 추억도 만들어보고, 좋지' 


마침내, 다행스럽게도 이미 승선도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가까스로 선착장에 도착해서 배를 타려는 사람들의 대기열  거의 마지막에 붙어서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조금씩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속으로 아무리 불안해도 가급적 티를 내려하지 않습니다. 자기 암시와 최면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확신을 객관화하려 하고, 그에 대한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려고 애씁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의미 없는 노래를 반복해서 웅얼거리며,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심정을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안정적으로 수습되면 자신은 전혀 불안해하거나 걱정한 적도 없었음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고,  솔직했기 때문에  안절부절하던 모습을 보였던 사람들을 놀려주기까지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다 압니다. 그러는 너도 나만큼 불안해하고 있었다는 걸. 너는 나보다, 나는 너보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바람 세게 부는 마라도 억새밭을 날다시피 걸어오면서 우리는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속으로 인정합니다. 

놓쳤을 수도 있는 배를 무사히 탔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난 다음에 말입니다.

그리고 한동안은 입을 꾹 다물어야 합니다.



협재 해수욕장 인근의 '꽃돈'이라는 돼지고기 구이집과 11만 원으로 방 두 개짜리 객실을 이용한 카이리조트에서 내다본 협재 해수욕장 부근의 밤 모습



모슬포를 떠나 오늘 밤 우리가 묶을 협재 해수욕장의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밤에 먹을  제주 흑돼지 5 겹살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올레길을 걷는 동안에는 걷기 위해 제주에 온 듯한 느낌을 가졌다가 방어회를 앞에 놓고선 역시, 그래, 난 방어 먹으러 여기 온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주도 돼지고기 때문에 여기 온 것 같습니다.  

예전에 올레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고깃집인데 부산에 있으면서도 오래전 헤어진 여인 생각나듯이 문득문득 생각나는 집입니다. 가족들과 왔을 때도 애들이 극찬을 하던 집입니다. 두툼하게 쓴 돼지 오겹살과 목살을  섞어서 내놓는데 풍부한 육즙을 품고 있는 고기는 전혀 질기지도 않고 부드럽습니다. 지난번에 애들과 왔을 때 기름(비계든가)이 좀 많았던 것 같아 기름을 조금 덜어내고 달라고 한 것이 후회가 될 정도로 비계도 맛있습니다. 인상 좋은 젊은 사장이 옆에 서서 초벌구이 및 먹기 좋게 손질해 줍니다. 이번이 네 번째 같은데 두 번째 왔을 때 날 기억한 적이 있어 이번에는 아무 말도 않고 혹시나 나를 알아보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작년 겨울에 왔으니 만 2년 만에 방문한 셈이 됩니다. 그런 상황을 못 견디고 뚱뚱이 친구가 산통을 깨버렸습니다. 어쨌거나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도 제주의 맛에 취합니다.




요즘은 저가항공 때문에 제주 오는 항공료가 주중 시간을 잘 선택하면 부산에서 서울 가는 KTX 요금 보다도 더 저렴하기 때문에 제주에 자주 오게 됩니다. 처음에는 모두 그렇듯이 제주의 풍광 때문에 올 겁니다. 올레길을 걷기 위해서건, 제주의 명소들을 둘러보기 위해 왔다가 맛있는 먹거리를 접하게 되는 게 일반적일 겁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제주에 올 땐 우선 먹거리가 주가 되고 부차적으로 올레길을 걷거나 관광지를 둘러봅니다. 이번처럼 방어와 제주 흑돼지 먹으러  왔다가 낮에 비는 시간에 올레길을 걷는 이런 식입니다.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지만 나이 탓으로 돌려 버리렵니다.



제주항 부근의 물항식당의 고등어구이와 동문사거리의 산지천



비행기 시간이 어중간해서 남는 시간 동안 제주항 주위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물론 맛있는 집 탐색 겸해서 말입니다. 동문사거리 주위의 재래시장도 둘러볼 생각으로  제주항 근처의 탑동 인근을 어슬렁 거리는데,  산지천을 따라 거리 정비를 깨끗하게 잘 해 놓았습니다. 일본의 어느 깨끗한 소도시에 온 느낌도 납니다. 제주에 여러 번 왔지만 제주시 그리고 제주항 주변을 걸어서 다니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뚱뚱이 친구가 기억을 되살려 가며 여러 곳을 기웃거리다가 마침내 찾아왔습니다. 제주 왔으니 구이는 먹어줘야겠죠. 어제 비록 고등어회는 못 먹었지만 구이 정도는 먹고 가야 합니다. 한치 물회까지 시켜서 맛있게, 제주에서의 마지막을 물항식당에서 장식합니다.



탑동 해안도로



배도 부르고, 시간도 넉넉해서 공항까지 걸어가렵니다.

놀멍 쉬멍 갈려고 길을 나섰는데 날이 너무 덥습니다. 그리고 길도 생각 외로 멉니다.

그래서 택시를 탑니다. 이번에 제주 와서 택시 처음 탄다고 서로를 달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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