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미역 Jan 07. 2017

남이섬엔 눈이 없었다

연말이라고 평소와 달리 특별할 것도 없고, 그래서 언제나처럼 한가하고 여유롭습니다. 

달력에다, 수첩에다 적어놓고 기억해야 할 일정들은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무심한 듯 항상심을 유지하고 있는데, 방학을 맞은 함께 사는 여인은 그렇지가 않은가 봅니다.

나와는 성격이 다른 규칙적인 생활을 하다가 자유로워질 40일 정도의 시간에 대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계획해 온 듯합니다. 

마침 우리의 결혼기념일 날인 23일부터 방학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날부터 바쁜 일정이 시작됩니다.

24일엔 집안에 제사가 있어 밤늦게 집에 돌아왔지만, 25일 아침에는 날 데리고 가기를 미리 포기하고 혼자 라라랜드라는 영화를 보러 갑니다. 26일 월요일은 치과 갔다가 처가에 들러서 평소 퇴근시간보다 더 늦게 집에 옵니다.

그리고 오늘 27일 남이섬 버스킹입니다. 나는 버스킹이 버스 트레킹이라는 걸 오늘 처음 들고 알았습니다.

 


남이섬 선착장에는 산타 복장을 한 소녀 조각상이 입도객들을 맞아주고, 그 뒤편에선 상고대를 만들기 위해 스프링클러에서 연신 물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남이장군 묘소를 거쳐 발길질 조심하라는 타조를 만납니다.



요즘은 둘이 같이 하는 일정은 거의 이 여인이 주도합니다.  나 혼자 다녀오는 고생하는 배낭여행을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을 비롯해서 오늘 같은 국내 당일 장거리 여행, 부산 근교의 간단한 트레킹, 그리고 영화나 미술관 및 박물관 관람 등 거의 모든 행사의 일정을 계획, 조율하는 우리 집안의 순실입니다. 그러고 보니 둘이 종씨입니다.

내일 28일은 영화의 전당에 카즈미 타테이시 트리오의 내한공연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지브리(Ghibli)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재즈로 편곡한 곡들을 연주한답니다. 난 일본 애니메이션들을 좋아하지도 않고 본 적도 없지만 공연장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재즈라 하길래. 그리고 29일은 그녀가 치과 가는 날이라 쉬고, 30일은 버스 타고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경북 및 강원도로 버스킹 갑니다. 그러면 12월의 마지막 주는 바쁘게 지나갈 겁니다. 나의 의도와 관계없이 말입니다. 



여기는 볼거리가 별로 없나 봅니다. 아주 한적하니 좋습니다.



부산은 여행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열악한 도시입니다. 어디를 가든 이동거리가 상대적으로 멀기 때문입니다. 부산에서 경기도 가평 남이섬까지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예전에 젊었을 때는 지금과 같은 고속화된 국도가 아닌 7번 국도를 한계령의 단풍에 매료되어 수년간 가을만 되면 부산에서 속초까지 7-8 시간 씩 차를 직접 몰고 다녀오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엄두조차도 내기가 힘듭니다.  그게 이번 여행에 따라나서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들 가 봤다는 그곳을 직접 운전해서 다녀올 엄두는 안 나고 가보고 싶기는 하고, 혹시나 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더불어 말입니다.

6시 20분까지 집결지에 정시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거의 4시 반에는 일어나서 설쳐야 합니다. 평소에도 새벽에 저절로 잠이 깨고, 또 홀로 하는 배낭여행의 경험들이 누적되어 감에 따라 알람 없이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짐 싸는 것쯤은 문제도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가 버스보다 먼저 가서 기다립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조금 여유가 생기니 잊고 있던 걱정거리가 살며시 고개를 듭니다. 여자들이 주류가 되어 평일에 출발하는 버스 트레킹에 과연 할 일 없는 남자 백수가 몇 명이나  참가할지, 혹시나 청일점의 신세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소심함이 발동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싣고 갈 버스가 도착하기 바쁘게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을 먼저 살펴보고, 재빨리 버스 안을 둘러봅니다. 우려했던 대로 남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버스는 비어있는 몇 자리의 주인들을 태우기 위해 다음 집결지를 향해 출발하고, 나는 제발 한 명이라도 좋으니 늙어빠진 영감이든 백수 청년이건 버스에 올라 타 주길 기원하며, 여전히 밖은 캄캄해서 쳐다봐도 내 얼굴밖에 보이지 않는 차창으로 어색한 시선을 옮깁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버스는 멈추고, 로또 복권 추첨방송을 보는 심정으로 버스 앞문을 주시합니다. 현재 이 버스에는 기사님과 가이드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평균 연령 50대 중반은 훌쩍 넘었음이 확실한 여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제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함께 버스를 타고 갈 여인이 '괜찮겠어요? 거의 다 여자들 뿐일 텐데' 하고 묻길래, '내가 어디 모자란 데가 있나? 난 모든 면에서 평균 이상인데' 하며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설마 했었습니다. 나 혼자는 아니겠지. 남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속 한 장면 같습니다.



나는 복권을 사본 적이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평균적인 남성들이 구매한 횟수보다 훨씬 적을 겁니다. 그게 투기나 도박성향의 유무보다는 확률적으로 당연할 수 있는 그 몇 번 되지도 않는 실패의 경험 때문일 겁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나의 바람을 비켜갑니다. 40석인가 45석인가 잘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좌석이 만석이 되도록 승객을 태우고 버스는 남이섬으로 출발합니다. 청일점의 중늙은이가 전전긍긍하는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길을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역발상 나무랍니다.



근 5시간 가까이 달려서 남이섬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부산에서는 먼 거리라는 걸 실감하였습니다. 올라오는 도중에 들른 제천 휴게소에 풍성하게 쌓여 있던 눈을 보고 버스를 타고 온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고, 덩달아 신이 난 트레킹 대장은 자기가 어젯밤 기도한 덕이라느니, 오늘 여기 버스에 탄 사람들은 마음씨가 착한 사람들이라는 둥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눈 덮인 남이섬을 보여 줄 것처럼. 당연히 우리도 그런 기대를 가졌고, 사실 이 시기에 눈이 없는 남이섬은 뭐가 볼 게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천 휴게소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날은 더 맑고 화창해지고,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던 눈 쌓인 먼 산들도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리고, 가끔씩 음달진 어딘가를 지나갈 때만 눈 녹은 흔적이나 그래서 질퍽해진 길들 만 보일 뿐 요 며칠 사이 눈이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고 오늘 눈이 내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의 눈에 대한 기대가 체념으로 바뀌는 사이에도 차는 달리고 달려 여기 남이섬에 도착했습니다.



닥종이 공예가 김영희 조각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난생처음 와 보는 남이섬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남이섬을 처음 보는 것보다 더한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대형 버스들이 수도 없이 주차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외국인들을 실어 나른 차들입니다. 통상 관광버스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 버스도 조수석 쪽 앞 유리창에 한글로 '남이섬 트레킹'이란  행선지 표시를 해 놓고 있는데, 여기 주차된 차들은 거의 다 중국어, 일본어로 된 표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어쨌든 내  시야에 들어온 버스들은 모두 다 외래어로 된 행선지 표지를 붙이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중국이나 일본에 와 있는 느낌입니다. 말로만 듣던 남이섬의 위력을 실감하며 대부분이 아시아계로 보이는 관광객들과 섞여서 섬으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아마도 중국 관광객들로 보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기억에 남을 재미있는 자세들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볼거리들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섬을 둘러보며, 눈이 없어 약간은 밋밋한 풍경들에 조금은 아쉬워하는데, 나보다 더 멀리서 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모두들 표정이 밝고 들떠서 이국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들의 대부분은 여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 드라마나 한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일 겁니다. 보기 좋습니다. 어느 누구든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면 나도 그런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눈이 없어 아쉬웠던 마음은 이제 사라지고 없습니다. 중국인들은 홍콩이나 대만인 그리고 싱가포르인들과 잘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어딜 가나 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또 히잡을 쓴 이슬람계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그들도 한 부류로 인식되기 때문에 여기 남이섬은 중국계와 이슬람계 관광객들이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지금이 겨울이고 평일인데도 이렇게 관광객들이 많은데 가을이나 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릴까 생각해 보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얼마 전 갔다 온 중국의 구채구에는 여기보다 수십 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뤘지만 외국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기들끼리 밀치고 새치기하던 것 과는 대조적입니다.

워낙 작은 섬이다 보니 대충 둘러보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숙박시설들도 있어 가을이건, 눈 오는 겨울이건 섬에서 일박을 하고 아침 일찍 섬을 둘러보면 더욱 환상적일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조각들과 설치 미술품들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어 꼼꼼히 음미하며 둘러보면 더 좋을 듯합니다. 

예전과는 달리 겨울연가의 느낌과 이미지는 많이 퇴색한 듯합니다. 주인공들이 늙어 가듯이.





에지간히 둘러봤는 데도 부산으로 출발할 버스를 탈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다시 한번 더 빠뜨린 곳을 둘러보기도 하고, 호떡도 사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으러 간 식당에서 최악의 경험을 하고 나왔습니다. 한 그릇은 막국수 같았는데 다른 한 그릇은 쫄면이 나왔습니다. 항의를 해봤지만 면을 덜 삶고, 더 삶은 차이랍니다. 어이도 없고 기가 찹니다. 그런 마음상태로 식당안을 둘러보니 다른 외국인들도 음식을 먹으며 별로 즐거워하는 표정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못해 먹는 그런 표정들. 

섬을 나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자고 한 나의 말을 안 들은걸 후회하는 표정이라 더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같이 간 여인에게. 

요즘은 고속도로 휴게실을 위시하여 공공시설들에 설치된 대부분의 화장실들이 너무 깨끗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이란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렇지 못한 나라들의 그렇지 못한 화장실들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장실에 난방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청결하며, 또 내가 다 보지는 못했지만 여태껏 지나오면서 본 화장실들의 디자인이 다 다릅니다. 똑같이 생긴 화장실을 못 봤습니다. 그중 한 곳에 들러서 분노의 칫솔질을 하면서 맛없고 어이없는 춘천 막국수의 나쁜 기억들을 지워버렸습니다.





오랜만에 단체로 움직이는 버스여행을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아주 시간을 잘 지킨다는 겁니다. 휴게소에 주차해서 출발할 때나, 흩어졌다가  모이는 시간들을  잘  준수하고 있습니다. 차 내에서 청결을 유지하려 애쓰고, 대부분이 여자들인데도 특유의 수다스러운 소란 같은 것도 전혀 없습니다. 

이제 버스는 부산으로 출발합니다. 눈이 없어 아쉬운 마음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내가 운전하지 않고 이렇게 먼 길을 와서 나 빼고는 모두 다 와봤다는 그 유명한 남이섬을 보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여행입니다. 그렇게 조용히 자다 깨다 하면서 부산까지 왔으면 오늘의 여행은 나름 의미가  있는 그저 그런 여행들 중의 하나로 기억되었을 텐데. 그런데 말입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한 시간 남짓 지나자 트레킹 대장이 무료해하는 승객들을 위해 영화를 한편 틀어주겠노라며 볼 영화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내가 본 영화도 있고, 제목이 처음인 영화도, 그리고 내가 안 본 다양한 영화 제목들을 보여주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대다수 아줌마, 평균 나이가 55살은 넘어 보일 그 여성들이 압도적으로 연호하는 영화가 '아가씨'라니. 나는 물론 같이 앉아 있는 여자랑 이전에 같이 본 영화입니다. 내 기억으로는 이런 공공장소(?)에서 다 같이, 그것도 대부분이 초면인 사람끼리, 그리고 나이 많은 여자들이 보고 싶어 열광할 영화는 아닌 걸로 생각하는데. 내 뒤편에 앉은 조금은 젊은 여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상영됩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약 두 시간 동안 나는 민망해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화면은 쳐다볼 엄두도 못 내고 그렇게 힘들게 부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놀라운 하루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먹으러 갔던 제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