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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Dec 08. 2016

소품들 때문에 그 길이 더 걷고 싶다

제주 올레 8 #3

어느 모퉁이를 돌자, 올레길 8코스와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했던 거의 모든 블로그들에서 언급되고 있던 팔길카페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팔길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으나 8코스의 길이란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분위기 좋고 실내장식이  이쁜 카페를 좋아하는 디자인 전공의 동행하는 친구는 당근 들렀다 가야 된다는데, 몇 안 되는 손님들이 다 외국인입니다. 외국인과 영어에 울렁증이 있는 난 그냥 가자고 하지만 친구는 생각이 전혀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가 외국인 때문에 가고 싶은 데를 못 간다는 게 말이 되냐고. 맞는 말입니다. 

들어가서 자리 잡고 앉아보니 그냥 지나쳤으면 좀 아쉬웠을 만큼 전망이 좋고 나름 커피도 맛있습니다. 큰 통유리를 통해 내다보는 바다는 우리들 눈높이에 맞춰진 액자 속의 풍경 같기도 하고, 큰 스크린 속의 영화 장면 같기도 한 게 여태껏 걸어오면서 보던 바다와는 좀 다른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요란하게 꾸미지 않은 실내는 풍경화처럼 재단된 창밖의 조용한 바다와 어울립니다. 

화창하지 않은 11월의 볕을 쬐며 밖에 앉아 여유롭게 책을 보고 있는 외국인 여인과는 달리 실내의 외국인 커플은 맥주를 앞에 두고 자못 심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카드 대신 현금으로 커피 두 잔 값을 지불하고,  현금영수증도 요구하지 않는 손님들을 좋아한다는 표정의 젊고 약간 뚱뚱한 카페 지킴이 총각의 인사를 받으며 길을 떠납니다.



팔길 카페



물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해녀를 보고 있자니 우리는 누구나 다 자기가 짊어지고,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짐들을 이고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보이지 않기에 잠시 잊고 살지만, 우리의 뒷모습도 분명 저럴 것입니다. 

조금만 힘을 빼면 금방 뒤로 나자빠져 버릴 만큼의 무게를 지고, 

좁은 어깨에 굽은 허리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만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런 모습. 

어쩌다 힘이 들어 잠시 내려놓고 싶어 돌아봐도 짐은 보이지 않고 걸어온 길만 아득한.


해녀라고 부르기가 조금 민망합니다. 

대부분이 할머니들이기 때문에 '아! 저기 해녀가 혼자 가네' 하면 왠지 무례한 느낌이 듭니다. 

'아! 해녀 할머니' 이게 자연스럽고 편합니다. 나도 중늙은이지만 말입니다.


이 길은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해녀 할머니의 뒷모습을  위한 길 같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 누가 걸어도 어색하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길,

소라, 고동, 해삼을 이고 지고 가는 해녀 할머니에게만 어울리는 길.

제주 올레길 8구간에는 그런 길도 있습니다.





저기 멀리 박수기정이 보이면 올레 8코스는 이제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박수기정이란 박수와 기정의 합성어로, 바가지로 마실 샘물(박수)이 솟는 절벽(기정)이라는 뜻으로 올레길 9코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엄한 전경은 여기 8코스 종점 부근에서 더 잘 감상할 수 있습니다. 

성벽처럼 산방산 앞을 병풍처럼 막고 서 있는 자태는 쉬이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서려 있습니다. 뻗어나가지 못한, 그리고 솟아오르지도 못한 좌절과 울분을 박수로 승화시킨 저기 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어떠할지, 그리고 저 너머에는 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지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런 박수기정을 배경으로 물고기를 가슴에 품고 바다를 등지고 앉아 있는 해녀 할머니를 만납니다.  물에 들어가기 전인지, 아니면 물에서 나와서 쉬고 있는 중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무암으로 형상화된 얼굴 표정은 수심이 가득한 듯합니다.  다 빠져나가고, 다 스쳐 지나가고, 남은 건 가슴에 품고 있는 물고기 한 마리뿐, 그래서일까.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가는 객의 입장에서는 해녀 할머니의 밝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겠지만, 그러면 그 생활들은 거짓말이 될 것이라는 걸 작가가 우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박수기정



멀리서 보니 내가 가본 곳은 아니지만 그리스 산토리니풍의 건물이 주변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뚱한 모습으로 거대하게 성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화덕 피자집 3657이라는 레스토랑인데 마침 휴일이라 문이 닫혀 있습니다. 물론 여기까지 와서 피자를 먹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집을 너무 크게 잘 지었고, 가까이 가보니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의 느낌도 나고 해서 안을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포기해야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이런 규모의 피자집을 짓는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일임에 분명한데, 대단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속인의 눈에는 궁금한 게 많습니다. '건축비가 얼마나 들었는지, 종업원이 몇 명이나 되는지, 일일 평균 고객은 몇 명이나 되는지 그리고 현재 수지가 맞는지 등등', 싫어도 전공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하지만 디자인 전공의 뚱뚱한 친구는 아마 그런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눈치입니다. 내가 볼 때는 전공에 걸맞는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과체중에 맞게 저 집의 피자맛을 더 궁금해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아침에도 해장국 대신 피자를 먹을 만큼 피자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덕 피자집 3657. 일 년 356일 동안 행운 7 이 있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랍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올레길 8코스의 종점 용왕난도르 마을의 대평포구입니다. 

노을빛과 예술이 어우러진 마을이라고 어디에선가 본듯한 기억이 떠오르는 건, 

붉은 등대 위에 서 있는 소녀 조각상을 보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박수기정이 눈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예쁜 카페들이 자주 눈에 띄었고, 

해녀 할머니 조형물 그리고 피자집의 구엘공원을 흉내 낸 담벼락 등 애쓰고 공들인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러한 소품들을 배치함으로써 제주의 자연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부가가치가 더해지고,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마지막 목표지점을 향하는 올레꾼들에겐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진 기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방파제 위의 소녀는 우리가 걸어온 쪽, 지나쳐 온 곳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치켜든 턱을 보면 어쩌면 그 뒤의 한라산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슬프고 수심에 가득 차 있던, 얼마 전 지나쳐 왔던 해녀 할머니가 고개를 떨구고 가슴속에 담아 둔 말들을 삭이고 있는 모습과는 다릅니다. 소녀는 웅변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 차 있습니다. 끝이 아니라 시작된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 여러 의미를 담은 시작. 

두 작품의 작가가 동일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대평포구에서 올레길 9코스가 시작됩니다.



웬지 고집 세 보이는 방파제 위 등대의 소녀상





내가 좋아하는 예쁜 개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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