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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Dec 06. 2016

중늙은이들의 올레

제주 올레 8 #2

모래사장을 건너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가뜩이나 걷기 싫어하는 늙은이들에게 산을 오르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어쩔 수없이 색달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길에 접어듭니다. 힐링과는 거리가 먼 생과 사의 줄다리기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합니다. 일단 멈춰 서서 지켜보기로 합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필사적인 눈빛으로 목표물을 주시하고 있는 반면에, 표적은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나 태연히 깡충거리며 제 할 일을 합니다. 고양이가 전혀 성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새가 불쌍하다기보다는 허탕을 칠 고양이가 애처로워 상황을 종식시키기로 합니다. 내가 끼어들자 둘 모두 자기 자리로 찾아갑니다. 

길은 다시 올레 본연의 평온을 되찾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새, 그리고 오늘만 하더라도 몇 번을 더 저러고 있었음이 분명한 애처로운 고양이



올레 8코스는 중문의 유명한 호텔들을 다 스쳐 지나갑니다. 

롯데, 신라, 하얏트 호텔 그리고 한국콘도까지. 

그러기에 어느 다른 코스의 길보다 길 자체의 멋보다는 사람의  손길로 빚어낸 아기자기한 공들임과 정돈된 느낌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자연 그대로 내던져진 길을 걷다가, 여기 어름에 와서는 공들여 어루만지고, 다듬고, 마지막으로 닦아서 윤기까지 나는 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과하지 않게 적절하게 쓴 조미료 때문에 훨씬 더 풍성한 맛을 낸 음식들이 가득한 상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낍니다. 

걸으면서 말입니다.



신라, 롯데호텔 측에서 공들여 조성한 길도 걷습니다



올레 8코스길은 색달해변 들머리에서 모래사장을 건너는 A코스와 바다를 등 뒤에 두고 산길로 걷는 B코스로 나뉘는데 우리는 그런 것 무시하고 우리만의 코스를 만들며 나아갑니다.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얏트호텔을 지나면서 아까 오른편에 두고 걸었던 호텔신라를 정면으로 보고 걷습니다. 우리는 신라호텔이라고 부르지만 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은 호텔신라로 통합니다. 나랑 악연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풀리겠지만 말입니다. 저 놈의 주가가 폭락해서 주주인 나의 고민을 깊게 만들어주고 있는 애물단지 중 하나입니다.  

오던 방향으로 분명 되돌아 가기도 하면서, 이 길을 걸어오며 한 번도 품지 않았던, 제대로 가고 있는지 하는 의문도 품게 될 만큼 여기 주위를 걷다 보면 방향감각을 잃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네이X(네이버의 애칭입니다)의 지도를 불러보면 이 길이 맞다고 친절히 안내합니다. 지 욕하는 줄 모르고 언제 어디서건 부르기만 하면 튀어나와서 뭐든지 친절히 가르쳐주는 네이X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그녀와 묻고 답하며 두리번거리다 보니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앞입니다. 그리고 시장기를 느끼자 말자 바로 우리들 두 늙은이가 기대하던 국숫집이 나타나고, 그 집에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고기국수가 있었고, 또 아주 맛있었다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제 길은 다시 바다 쪽으로 향합니다. 시간을 염두에 둔 길은 관성의 법칙이 적용되어 그 위에 올라서면 좀체 멈추려 하거나 좌우를 살필 틈이 나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쉼과 힐링을 표방하는 올레 길은 수시로 바다를 엿보고 오름을 훔쳐봅니다. 

한라산 어느 언저리에서 발원했을 물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바다가 나올 겁니다.  저류지를 지나쳐 온 물들이 바다로 향해 가며 키 작은 억새들이 가을 풀들과 어우러져 내는 소리는 질정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내는 소리와 달리 웅변조로 힘이 있습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억새 소리, 거기에다 곧 나타날 이미 익숙하지만 또 조금은 색다를지도 모르는 바다에 대한 기대까지 더하여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차들을 위한 길 예래로를 빗겨 나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길을 한참 따라 걷다 보면 예래 해안로를 만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8코스 종점에 이르기까지 계속 해안길이 이어진답니다. 그 길에 접어드는 초입에 곶자왈 빌리지라는 마을 이름도 예쁜, 어림잡아 100채는 넘을 대규모 고급 주택단지가 아직 완공이 안된 상태로 조성중에 있습니다. 아름다운 길에 걸맞게 종래 봐 왔던 획일적인 구조의 건축물이 아닌 제각각의 구조와 디자인을 달리하는 단독 2층 주택들이 공들여 제작되고 있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제주 앞바다를 품에 안은 저렇게 혜택 받은 집에 살게 될까 부러운 호기심을 애써 누르고,

잠시 쉬면서 돌아본 길은 내 나이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새, 참 많이도 왔구나!' 



곶자왈 빌리지 건축현장. 그런데 건축 중이라기보다는 건축이 중단된 상태처럼 보입니다.



길을 조금 더 가다 보면 논짓물이라는 천연 수영장이 나타납니다. 민물(용천수)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자연수를 이용하되 인공적으로 물막이를 한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한  물놀이장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 철이 아니기로서니 안내 표지판이 없었다면, 또 그걸 채 보지 못했다면 과연 누가 여기를 여름 물놀이장이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날의 사람도, 그 날의 흔적 한 점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주 긴 시간 동안 어느 누구 하나 마주친 적 없는 길 위를 걷고 있습니다. 

길에 취하고, 물에 홀리고, 바람에 이끌리다 보니.

그 시간을 잊고 있었습니다.

제주 올레길 위에서 말입니다.



논짓물 물놀이장과 그에 인접해 있는 족욕카페 및 게스트하우스



역광을 받고 서 있는 조사들의 모습이 멋있어 보입니다. 

나도 한동안 낚시에 빠져 나름 조사 티를 내며 전국의 여러 갯바위 낚시터를 돌아다녀 봤지만,

 ... 개고생입니다.  

겨울에는 칼날 같은 바람을 동반한 혹독한 추위 때문에 미끼를 갈아 끼는 손가락이 얼어붙는 것 같고, 그리고 여름에는 바람 한 점 없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 죽자 사자 달려드는 파리를 쫓아가며 좀체 미동도 하지 않는 찌를 주시하고 있으면 '내가 이렬려고 낚시를 배웠나' 하는 후회가 막급입니다.  거기다 밤까지 새운 날은 다음날 배를 타고 뭍으로 나올 때쯤이면 거의 초주검 상태에, 씻지도 못한 몰골은 새우 미끼의 역겨운 냄새까지 더하여 거지가 그런 상거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출조할 때 드는 비용 또한 골프를 능가합니다. 용케도 성과가 좋은 날엔 그나마 널어져 누워있는 놈들의 마릿수를 세어보며 흐뭇 뿌듯해서, 들인 비용과 자초한 고생이 조금은 보상이 되지만 불행히도 그런 날보다는 그렇지 못한 날들이 훨씬 많습니다. 

정작 웃기는 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한 개고생을. 그래서 또 틈만 나면 낚시가방을 챙깁니다.

머리 나쁜 물고기나, 그런 애들을 잡으러 금방 개고생 한 것들을 잊고 사는 낚시꾼들이랑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런 조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좀체 그 자태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 한라산이 침상의 커튼을 걷고 어리석은 조사들을 웃음 머금은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여러 번 제주에 왔지만 저렇게 웃는 모습의 한라산은 참 오랜만에 봅니다.

기분 좋게 길을 재촉합니다.



제주 사는 사람들도 좀체 보기 힘든다는 한라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처럼


바다가 물러간 자리에는 또 다른 바다가 생겨 

그만한 하늘을 담고 있는 구멍 숭숭한 바위는 

매번 바다를 배신하지만, 

그때마다 길이 되지는 못합니다.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의자라 불러 주듯이

그 배신도 진작부터의  그리움이란 걸 이해합니다.


아! 몰랐습니다. 

되돌아봤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걸.

그래서 나이 먹는 게 그렇게 손해 보는 것 같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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