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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제주

제주 올레 8 #1

by 물미역

누군가를 붙들고 여행을 가는 이유나 목적을 물어봤었을 때 그 답이 나와 같을 확률이 1%나 될까 말까 한 그렇게 드문 이유 때문에 이번 제주여행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항공권이 싸서'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황당한 이유로 2박 3일을 지우러 왔습니다.

비록 일요일과 평일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57,800원에 부산과 제주를 왕복한다는 건 느낌이 거의 공짜 같습니다. 부산에서 서울 가는 KTX 편도 기차요금과 비슷하니까.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절체절명의 사명감까지 느낍니다.

그리고 그런 은총을 공유하고파서 최근에 홀로 다녀왔던 자유여행들과는 달리 이번에는 나만큼은 아니지만 평균적인 직장인들 보다는 훨씬 시간이 많은, 퇴직을 고려중인 중늙은이 친구 한 명과 동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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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포구. 올레 8코스의 출발지는 여기가 아니고 월평에서 시작하는데 코스를 단축시켜 올레 길을 좀 더 느리고 편하게 걷을 요량으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600번 버스가 리무진 버스인 줄 알았다면 제주공항에서 한치의 망설임이 없이 버스를 바로 탔을 텐데, 괜히 엉뚱한 시외버스 정류장을 찾다가 약간의 지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이란 게 겨우 10분도 채 안되고, 또 600번 버스를 전혀 기다리지도 않고 즉시에 탈 수 있어서, 일정을 짜고 여행을 주도한 사람의 입장에서 시작부터 그렇게 불안감을 조성한 것 같지는 않다고 자위하며 우리의 올레 8코스 출발지인 대포포구에 도착했습니다.

익숙한 듯 조금 낯설고, 낯선 듯 하지만 어딘지 또 익숙한 느낌의 포구는 럭셔리해 보이는 두 대의 요트로 인해 방파제가 가리어지고, 그래서 혹 주위에 있을지도 모르는 어선도 보이지 않아 어촌의 느낌이 나는 포구라는 명칭 대신에 요트계류장의 느낌을 줍니다. 어쨌거나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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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기대 이상의 것을 줍니다. 올레길 말입니다.



길을 걸으면서,

멀리서 우릴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말없이 늘어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그저 그윽하게 바라보기만 하던 풍경들이 바뀌고,

이전에 여기가 아닌 저 공간에서 봤을 때는 눈에 채 담지 못해 이해하지 못했던 그 풍광들이

이제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되기도 하는 황홀한 체험을 합니다.

그 오묘한 길 올레를 걸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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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친구가 티베트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스치듯 얘기하면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가다가 돌아서서 한번 더 쳐다봅니다.



자연이 부리는 경이로운 조화 못지않게 인간들도 다양한 재주를 배워서 뽐냅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자연을 흉내내기 때문에 경탄을 자아낼 만큼의 그들이 이루어놓은 것들 앞에 설 기회가 작다는 것입니다. 이미 소소한 것들에 익숙해져 있고, 또 거기서 만족하는 법을 배운 우리들 눈에는 그렇기 때문에 길을 걸으며 너와 나의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뺏기 위해, 우리들 눈높이에 맞춰 그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제주, 올레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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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 주상절리



주상절리.

사전적 의미로는 다각형 원주 형태의 갈라진 틈이나 나란한 결을 말합니다.

마그마가 급속히 식어 오랜 시간 풍화작용을 거쳐서 생긴 틈을 절리라 합니다. 절리, 틈, 사이, 간격, 거리, 간극.

보여주지 않거나, 말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여 줄 수 없었거나,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모이고 또 그것들이 쌓여서 우리들 마음속의 주상의 절리가 됩니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내 마음을 보여 주고 싶었어' '그래, 언젠가는'

제주도는 화산섬입니다.

그래서 마그마가 식어서 생긴 현무암이 많고, 그런 바위에서 주상절리가 많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제주도는 바람이 많은 섬입니다.

그 바람들은 아픈 질곡의 역사들이 켜켜이 쌓인 마음속 주상절리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자, 회한입니다.

그렇게 제주도는 아쉬움이 많은 섬입니다.

제주도는 아픈 가슴을 안고 사는 사람을 닮은 섬입니다.

그런 섬을 걷습니다. 친구와 함께. 올레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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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길은 여기에 없습니다.

바다에도 하늘에도 길은 있지만, 여기처럼 굽이지고 일부러 둘러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쉬었다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고개 들어 멀리 앞을 보면 나를 마냥 날 이끄는 길, 돌아보면 정겹게 날 떠미는 길이지만

잠시 멈춰 서기만 하면 하냥 날 주저앉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제주 올레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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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부영호텔&리조트 옆 카노푸스란 카페를 지나고 있습니다. 앞쪽은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입니다.



아마 전날 비가 온 듯합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고, 거기다 11월 27일만큼의 추위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드럼통 속에서 익고 있을 고구마를 생각하니, 손부터 따뜻해지더니 어느새 가슴까지 화난하게 데워진 느낌입니다. 그러니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배경으로 외롭게 솟아있던 주상절리의 처연한 모습이 오래 마음속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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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릿내 오름을 옆으로 하고, 맞은편 요트 항구를 보며 천재 2교를 건넙니다.



이제 그만 바다를 버리고 오름으로 오르라는 길의 간곡한 부름을 완강히 뿌리치고 늙은이들은 여전히 바다를 고집합니다. '그래 생략하기도 하고 빼먹을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한 거야!' '그래야 아쉬움도 여운도 좀 남는 게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로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여전히 눈은 더 많은 것을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하지만 같이 걷고 있는, 나보다 약간 더 뚱뚱한 늙은이는 이런 내 속을 모릅니다. 저기 오름은 원래 우리가 가는 길이 당연히 아니라고 알고 있는 듯한 걸음걸이입니다. 거침없이 직진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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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관광단지 하이야트 호텔 앞 색달해변이 보입니다.



신혼여행의 추억이 있는 제주 하얏트 호텔. 결혼하고서야 처음 와 본 이곳 제주.

지나고 보면, 우습고 부끄럽고 창피한 기억들 뿐인 내 과거사의 한 조각이 여기 제주와도 엮여 있으니,

'신혼여행 안 가면 안 되나'.

왜 그랬을까. 단순한 치기였을까.

그리고 제주에 와서는 또 왜 그랬을까.

'부산 가는 비행기 안 떴으면 좋겠다'

그 당시 나랑 비슷한 수준으로 맞장구치는 여인이랑 한 방을 썼습니다.

'TV에서 봤을 땐 호텔방이 대궐처럼 엄청 넓어 보이더구먼 실제로 보니 쪼끄만 하네'

조금 더 지나면 그런 기억들 조차 내 것이 안될 것 같아 여기 이렇게 적어둡니다.

공식 명칭이 색달해변이란 걸 처음 알게 된 이 해변을 파마머리를 한 중늙은이랑 함께 걸어 볼 기회가 봉쇄됐습니다. 태풍 피해 복구 때문이랍니다. 저기 저기 어딜 가나 말 안 듣는 애들은 항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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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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