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함께 한 가족여행, 증도에서 #2
'El Dorado'
유토피아와는 또 다른 의미의 이상향, 꼭 가 보고 싶은 곳을 의미하곤 합니다.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남미의 아마존강 유역에 있다고 알려진 '황금의 도시' 말입니다.
그런데 느림을 표방하고 비움을 강조하는 슬로우시티 증도에 엘도라도가 있었답니다.
오래전부터 가족들과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오기 전에도 증도의 그 엘도라도에 황금칠을 한 도로가 뻗어있으리라는 허황된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표면이 숭숭한 갯벌이 펼쳐져 있으리라는 건 확신했습니다.
작년 중국 배낭여행 때 20일 가까이를 비용절감과 홀로 투숙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했던 값싸고, 썩 청결하지 않았던 중국 변방의 호텔들과 비교해 보고도 싶었습니다.
내가 와보고 싶었던 엘도라도라는 이름을 내건 이 호텔, 아니 리조트와.
모처럼 다 같이 하는 1박 2일의 짧은 여행을 가능하면 조금 더 인상적이고, 기억에 오래 남기고 싶어서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가지 무리를 많이 하려고 작정한 것도 엘도라도의 43평형 큰 방을 예약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중국과 서울의 작고 좁은 방에서 고생하는 녀석들을 생각하면 네 명이서 묵을 방인데 조금 과하더라도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증도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숙소에 묵을 사람들은 조금 소외감을 느낄 만큼 길 안내 표지판의 상당 부분이 엘도라도를 담고 있고, 조금 심하게 생각한다면 엘도라도 리조트를 중심으로 증도의 교통체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만큼 찾아가는 데는 아무런 애로사항이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멋지고 색다른 풍광을 대하면 자연스럽게, 그리고 익숙하게 쓰는 표현이 이국적이라는 단어입니다만 과연 엘도라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그런 표현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들뜨지 않고 차분하며 조금은 중후함이 느껴지는 건 리조트 건물들의 색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약한 방은 선셋 빌리지라는 이름의 독채 건물의 3층을 다 쓸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탁 트인 바다 전망이 일품이고, 구비된 집기들이며 구조들이 아주 쾌적합니다. 하지만 광활한 바다 전망을 매일 보며 살아온,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바다는 자그마한 정원 같은 느낌입니다.
저녁때가 되어 바베큐장 예약한 시간이 되어 준비해 온 고기를 펼치고 큰놈이 굽습니다.
집에서 일을 많이 한다는 묵계하에 외식을 할 때, 특히 고기를 먹을 경우 굽는 것은 대부분 애들 엄마 대신 내 차지였습니다. 근데 객지 생활을 몇 년 하더니 이제 그걸 큰놈이 하겠답니다. 그러고 보니 방학이 되어 큰놈이 집에 와 있을 땐 특히 와이프가 좋아합니다. 설거지도 도맡아 해주고, 마트에 데려가면 무거운 것도 척척 들고 해서, 별로 무겁지도 않은 걸 쩔쩔매며 드는 늙은 남편을 안스럽게 보아 온 와이프로서는 구세주가 따로 없는 듯합니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고기를 먹는 녀석들을 보니 그동안 이렇게 밖에서 직접 고기를 구워 먹은 적이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애들이 커가고 내가 늙어간다는 건 이렇게 가족과 함께 직접 고기 구워 먹는 횟수가 점차 줄어듦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고기 한 점 씹어먹는 시간이 더 소중해집니다.
"정도 엘도라도 리조트 예약했다"고 했을 때,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정도가 어디지?" 아무리 입을 가로로 찢어가며 '증도'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정도'로 들리나 봅니다.
한참만에 그들이 겨우 알아는 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정도'를 외칠뿐입니다.
나이 먹은 경상도 사내의 한계입니다.
결국 나는 '정도'에 가고 그들은 '증도'를 다녀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작은놈이 며칠을 쥐고 있으면서도 4페이지를 채 못 넘기고 있던 소설을 내가 하루 저녁에 다 읽었는데, 거기에 딱하게도 나랑 같은 애로를 겪고 있는 등장인물을 만난 것은 대단한 우연이 아닌가 합니다.
......
둘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이었다. 말다툼 끝에 그는 “그래, 내가 늘 오해한 거야. 정말이지 늘 오해한 사람이 바로 나였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날 오해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날 어떻게 오해했다는 거야?”라고 되쏘았던 것이다. 서로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말과 함께 헤어진 뒤,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깨달았다. 자신들이 멍청하게도 사투리 때문에 헤어진다는 사실을. 자신은 ‘늘’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널’이라고 알아들었다는 것을. 그녀는 고양이의 말까지 알아듣는 사람인데, 남자 친구의 사투리만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문학동네]
누군가 엘도라도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여전히 '정도'라 대답할 것 같습니다. 거의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