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함께 한 가족여행, 증도에서 #3
서해이기 때문에 거기 가면 멋진 갯벌과 뻘밭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증도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쉽기에 좀 더 절절한 낙조를 안주삼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싶어서도 아닐 겁니다.
일찍 상처한 친구의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녀의 이름과 같은 어선 '현미호'가 정박해 있던 어느 포구를 무심하게 걷다가, 애써 바다를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던 유난히 어깨가 좁은 그녀의 남편과 함께 걷던 새벽녘이 서해였기에 그 비슷한 기억들, 이제는 내 손을 떠난 시간들의 흔적들이 보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옛날에 동해와 남해와 서해를 비교해 보기를 좋아했을 때, 미련을 가장 많이 남기기 때문에 꼭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제일 많이 주는 바다가 서해라는데 모두가 다 동의했을 때, 매번 내가 가장 크게 고개를 끄덕였던 의무감 때문만도 아닙니다.
매일 그 윤곽이 일정치가 않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예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기도 잘하는 섬,
대마도가 보이는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아, 동해와 남해가 갈리는 언덕 위에서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180도를 넘어서는 시계로 수평선이 그어져 있는 그런 곳에 살면서도 바다가 그립다면
그건 바다의 탓이 아닐 겁니다.
증도.
누군가가 특히 그리움을 많이 탄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섬에서 태어났거나, 아니면 매일 섬을 쳐다보며 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움은 함께 하지 못함에서 연유합니다. 육지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섬은 그렇기 때문에 바다 건너 있는 육지를 늘 그리워합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집 가까이에 섬들이 있습니다. 시간에 따라 다섯 개가 되었다가 여섯 개가 되기도 하는 그런 섬입니다. 내가 항상 서 있고 하는 곳에서는 지금 그 섬들이 다섯 개로 변신했는지, 아니면 여섯 개로 조화를 부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언제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육지를 덜 그리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멀리 있는 섬, 증도를 찾은 건 그들이 가진 개별적인 그리움의 크기들을 비교해 보고 싶어서도 물론 아닙니다.
내가 증도를 찾은 건 오기 때문입니다.
시간이라는, 생활이라는 방어막으로 매번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엘도라도를 무너뜨리고 싶었습니다.
금이 없는 황금의 도시가 얼마나 대단한 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일종의 치기 때문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그리움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모이고 또 쌓여서 만들어진 갯벌들 옆에 잠자코 서 있고 싶었습니다.
혹시 노을이 너무 붉어서 그래서 외로워하면 뻘 속의 그리움들이 그 외로움을 달래주는 소리를 혹시나 들을 수 있을까 해서.
눈은 감고 귀는 열어놓은 채 해 질 녘 물가에서 숨죽이고 서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증도를 찾은 건 지금이 그렇게 하기 좋은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찾은 섬, 증도.
그 뻘밭에 서면, 이 세상의 그리움이란 그리움은 모두 다 모여 있는 이 뻘밭에 서면,
그리움 때문에 힘들어 지친 그 누구라도
앞으로 한동안은 도무지 이유도 없고 끝도 알 수 없는 그것 때문에
섬을 찾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