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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Apr 05. 2018

비바람과 함께 한 제주 올레 15-B

3박 4일간의 제주 올레 걷기#1

고내포구에서 시작합니다
한담 해안 산책로, 장한철 산책로를 걷고 있습니다


비보다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올레길을 걷습니다. 비행기도, 캠핑도 그리고 걷기에도 비보다는 바람이 더 많이 방해가 됩니다. 오늘 날씨가 이러리라는 건 기상예보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바다 건너에서, 싼 항공권과 호텔을 미리 예약해 놓은 입장에서는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많은 비가 아니라면, 우산 없이 고어텍스 바람막이 점퍼의 모자를 때리는 빗소리가 은근히 듣고 싶어 진다면, 금상첨화라고 속으로 쾌재를 부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15-B코스는 한림항에서 애월의 고내포구까지 이어진 구간입니다만 공항에서 시작하려니 공항에서 가까운 고내에서 역방향으로 걷는 게 나을 거 같아 그렇게 걷습니다. 다음날 15-A코스를 걸으며 알았는데, 비 오고 바람 부는 악천후에는 B 대신 A코스를 걷도록 권유하고 있었었습니다. 실제로 순방향으로 걷는다면 한림항에서 시작해서 조금 걷다가 A와 B코스로 나뉩니다. 그러니까 15코스는 반드시 A와 B 두 구간을 걸어야 되는 게 아니라 상황이나 취향에 따라 선택하도록 만들어진 코스입니다. B코스는 해안을 따라, 그리고 A코스는 내륙으로 산과 오름을 통과하는 구간입니다.





삼다도로 알려진 제주 하면 바람 아닙니까. 비까지 가세해서 파도와 어우러지니 움츠러짐이 즐거운 장관이 연출됩니다. 누구는 미쳤다고, 정신 나갔다고 비웃을 만큼 제법 양이 많은 겨울비와 바람이 함께 거세지고 파도도 난폭해지는 길을 걷습니다. 잔뜩 웅크리고 걷는 나와 달리 가슴을 펴고, 고개를 들고, 서서 바람을 맞는 더 철없는 그들이 반갑기도 하고 부럽기도 합니다. 이 악천후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분명  나와는 다를 겁니다. 비록 둘 다 자발적으로  이 비속에  서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쁜 여자는 찡그리고 화내는 얼굴도 이쁘다더니 여기 제주 바다가 그렇습니다. 바다와 파도가 아니었다면 눈길  조차 주지 않았을 폐품들조차  고운 마음으로 품어, 원래 옥빛 색이 고와서 예쁜 애월 바다는 이제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심하게 내려서 그 속에서 성난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머리 풀어헤친 바람에 점령당해 오고 가는 사람조차도 뜸한 길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발자국마저 지워버리는 건 파도가 부리는 심술이 아닙니다. 비바람 때문에 고개  숙인 채로 걷다가 무심코  그걸 보고 가슴 아파할 누군가를 위한 배려 때문입니다.

곽지과물 해수욕장이 저기 보입니다.





곽지과물 해수욕장을 지나면서 비는 조금 그치고 바람도 잦아든 듯합니다. 혹시나 하고 준비해 간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를 몇 번 하는 동안 날씨가 진정됩니다. 오늘의 목적지를 향해 귀덕 11길을 따라가다가 금성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오니 수많은 갈매기들이 먹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물고기가 많다고 하는데 혹시 여기서도 곽지처럼 과물이 용천수로 쏟아 나는지도 모릅니다만 지나가는 뜨내기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거기다가 아마 인근에 양식장이 있나 봅니다. 갈매기들의 먹이가 풍부할 여러 조건들이 갖춰진 갈매기들을 위한 장소이지 사람을 위한 금성 포구라는 이름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날씨 탓인지 배는 보이지 않고 까닭이 가늠이 되지 않는 포클레인이 좌초된 선박처럼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이런 날씨에 오늘은 더 이상 지나칠 이 없으리라 방심했던 탓인지 나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갈매기들이 하늘로 솟아 올라 괜히 사람을 미안하게 만듭니다. 갈매기들도 나름 영역다툼을 치열하게 한다는 걸 들은 것 같습니다.



복덕개 포구와 도대불


귀덕리 포구에 도착하니 포구가 있는데 이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 복덕개는 지금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포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크기가 그렇게 작음에도 불구하고 '복덕개'를 '큰개'라고 한다. 이는 이름 그대로 '복덕(福德)'이 들어오는 포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 巫俗社會에서 '영등신'이 음력 2월 초하룻날 들어왔다가 보름날 떠난다는 믿음이 있다. '영등신'은 바로 이 '복덕개'로 들어왔다가 우도로 나간다고 한다. '영등신'은 그 해의 바다밭은 물론 뭍의 밭에 뿌려질 씨앗을 가지고 온다고 믿는다. 그러니 '복덕'은 福德의 의미를 지닌 말일 수 있다. 그래서 영등 올레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금은 사라졌지만 영등 맞이 굿이 성대하게 열리는 포구였다(고영철의 역사교실). - 고 합니다.

그리고 도대불은 전기가 없던 시절 등대의 역할을 하던 시설로서 주로 민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가고 지금은 몇 개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등할망의 며느리, 그리고 좌측부터 영등 하르방, 영등할매와 영등 대왕, 영등할망 신화공원의 조각상


복덕개 포구 마을에는 영등할망 신화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 귀덕1리를 대표하는 풍경은 무엇보다도 거북등대인데, 등대의 아랫부분에 거대한 거북이 모양의 조형물이 있고, 그 위에 등대가 있습니다. 일주도로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면서 보는 등대로 갯바위 위에 세워졌고, 등대가 세워진 갯바위는 바닷물이 잠기지 않아 ‘석천도’라고도 불린다. 이 등대와 마주해서 있는 포구가 모살개다. 모살개는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서 모살개라고 불린다(제주 생태 관광). 





그런데 신기하게도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갈매기들이 모두 한 방향을 보고 있습니다. 단 한 마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쪽은 동쪽인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 녀석들은 아침이 될 때까지 저러고 있을 겁니다. 휴식이 필요해서 일까, 아니면 어두운 밤에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일까. 저 무리에도 우두머리가 있고 부모 형제의 관계, 친구와 연인 사이 그리고 원수지간으로  맺어져 있을까 궁금합니다.  

길은 그래서 좋은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돌아볼 여유도 없고, 곱씹어 고민해 볼 이유도 없는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채 앞으로만 걸으면 되고, 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꺼리를 찾아냅니다. 중요하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만약 바람이 심하게 불지 않고, 그래서 파도가 잔잔했으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장관이 연출됩니다. 올레 길은 비도 바람도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바람이 세차면 옷깃을 조금 여미며 고개를 숙이면 되고, 비가 심하게 내리면 잠시 쉬면서 피하고, 아니면 피할 만큼 비가 많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처럼 즐거이 맞으며 걷습니다. 올레길에서는 누구나 다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을 벗어나면 조화와 겸양과 배려는 사라지고 불균형과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이 반복되는, 우리네들의 삶의 장으로 변모합니다. 바람과 바다와 파도는 한 편이 되어 사나워지고, 당연히 그 앞에서는 누구나 다 약해지고 또 그러기에 필사적이 됩니다. 지나가다 저 광경을 보고 처음에는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은 분명 약하지도, 필사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이런 날을 기다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원재료가 싱싱하면 달리 조미료가 필요 없는 것처럼, 누가 어디서든 카메라면 들이대면 작품이 되고, 그 앞에 서면 누구나 다 모델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 위에 서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쉽게 착각에 빠져서 그 예쁜 길을 배경 삼아 얼굴 앞에 렌즈를 들이댑니다. 평소 그토록 빈틈없이 영리한 사람들이 말입니다.

누가 일부러 가져다 놓았을 리 만무한, 어쩌면 갈매기들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버리고 갔을 법한 폐물들이 우연히도 너무도 어울리게 제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내내 이어지는 이쁜 길에 감탄해서 넉넉해진 마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저게 요즘 유행하는 야외 설치 미술품 같은 작품처럼 보이는 건. 

돌담 너머에 있는 바다가 이걸 못 본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만.





이 녀석들도 모두 한 곳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얘들은 왜 바위 위가 아니라 여기 있을까 하는 별 쓸데없는 생각을 조금 하다 보니 오늘의 종점 앞에 당도해 버렸습니다. 애월에서 한림까지는 가히 갈매기들의 본거지라 할 만큼 수많은 갈매기들이 무리도 짓지 않고 어지러이 날아다니면서, 때로는 앉아서 쉬면서 지나가는 올레꾼들을 반겨줍니다. 그래서 어쩌면 부산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정겨운 길입니다. 올레 15-B 구간 말입니다.

이제는 잠잘 곳과 먹고, 그리고 마실 것에 대해 고민할 시간입니다.

이왕 이 동네 모든 어선들이 안전하게 피항을 했다면, 

오늘 밤, 

바람은 더 거세게 불고 비는 더 세차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혼자 마실 술이 더 운치 있고 분위기 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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