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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Apr 06. 2018

두브로브니크 성벽을 걸으며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4

보카르 요새와 로브리예나츠 요새. 방어를 위한 천혜의 자연조건을 이용하여 성과 요새가 지어졌습니다


필레 문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오른쪽으로 보카르 요새가 보이고, 고개를 오른쪽 뒤로 더 돌려 보면 성 외부에서 성을 보호하고 있는 로브리예나츠 요새가 보입니다. 과연 건축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조차도 성벽만을 보고도 그 속에 있는 도시는 잘 보호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만큼 벽은 견고해 보이고, 상대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위용도 지니고 있으며, 그 존재의 이력이 시간과 어우러져 훈장이 되어버린 빛바랜 벽돌 위에 내려앉은 무게감은 과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10군데 장소로 선정(트립 어드바이저)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두브로브니크 성벽은 중세 고성의 모습과 형태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10개의 성벽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1,940m, 가장 높은 곳은 25m이며, 해안을 따라 축조된 성벽의 두께는 1.5m - 3m, 육지 방면은 무려 6m에 이르는 곳도 있습니다. 8세기에 처음 성벽이 건설되어 그 후 15-16세기에 걸친 대공사로 지금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성벽과 견고한 성벽의 선후관계가 어떻게 정의되는지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두 가지를 겸비한 괴물 앞에 서 보니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나지 않습니다. 서둘러 성벽에 올라서고 싶고,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열망 외에는 다른 어떤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사치스러울 듯 느껴집니다.



도미니크 수도원과 지진의 흔적 그리고 두브로브니크의 전형적인 붉은색 지붕들 너머로 멀리 로크룸섬이 보입니다.
비가 그치고 엷은 빛내림이 생긴 두브로브니크, 정말 아름답습니다
성밖의 주택들 그리고 저 앞으로 민체타 요새가 보인다


총 세 곳에서 성벽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필레(Pile) 성문으로 들어가자마자 스트라둔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돌리는 지점, 그리고 도시로 향하는 동쪽 입구에 있는 세인트 이반과 세인트 루카 성벽입니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한 식당 옆에 있는 세인트 루카 성벽으로 오릅니다. 왼편으로 도미니크 수도원과 우뚝 솓은 종탑을 보며 걷습니다. 우측은 성벽 바깥입니다. 좁은 길에 주차된 차 중에 중형급 이상의 차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랑 많이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지진 활동이 잦은 지역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고대에 두브로브니크가 지진 피해를 입은 뒤에, 그리고 15세기 이후 더 잦은 빈도를 보이다가 가장 처음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지진은 1520년에 발생하였지만 최악은 1667년 4월 6일에 일어난 지진입니다. 성 내부에는 군데군데 이런 지진의 피해 흔적들이 보수되지 않은 채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민체타 요새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모습
요새의 전망대 내부의 창으로 보는 두브로브니크 시 전경


성벽의 모퉁이에는 4개의 요새와 16개의 감시탑이 있습니다. 필레 문부터 시작했을 때 첫 번째가 보카르 요새(Bokar Fort), 두 번째가 성 이반(St. Ivan Fort), 세 번째가 레벨린(Revelin Fort), 네 번째가 민체타(Minceta Fort)입니다.

우리는 역순으로 걷기 때문에 민체타 요새를 먼저 들르게 됩니다. 비가 그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크로아티아 국기가 휘날리는 전망대는 성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덕에 시가지 전체가 조망되는 멋진 뷰를 선사합니다. 요새의 창들을 보니 과연 어지간한 포탄이나 외부의 충격에 거뜬히 견딜 만큼 성벽 두텁고 견고해 보입니다. 아마 성과 요새가 지어졌을 무렵에는 이 창을 통해 내다보는 그 누구의 눈에도 핏발이 서 있었음이 분명하겠지만, 이미 적이 물러가고 난 다음 주인 아닌 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는 비수기 관광지의 고요한 적막만이 느껴지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성곽도시 일 뿐입니다.



민체타 요새에서 필레 문쪽으로 가는 내리막 길
가까이로는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멀리로는 두브로브니크 대성당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성벽들이 아기자기한 형태와 높이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하고 정겹게 축조되었음을 중국의 시안 성벽을 걸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압도적인 규모로, 그 위로 현대적인 탱크 두 대가 능히 교행 할 수 있을 만큼 넓고 두껍고 높고 길게 뻗어 있는 성벽을 보고 우리의 성들을, 성벽들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과연 그런 연약한 성과 성벽으로 어떻게 견뎌 낼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막아낸 횟수보다 뚫린 횟수가 훨씬 더 많았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이고 만만해 보이는 한국의 성벽과 오만하고 위압적인 중국의 성벽과 달리 여기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은 견고하기는 철옹성 같은 한편, 거대한 조각 작품과 같이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축조된 건축미까지도 가미된 성곽이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비잔틴제국과 베네치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굴곡진 삶을 이어온 이 도시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에 의해 발칸 내륙과는 단절된 자연환경 하에서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들이나 오스트리아 등의 서구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좁은 성 안에 가톨릭 교회의 양대 축인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도미니크회 수도원이 함께 있고, 여기저기 성당이 들어서 있습니다.



민체타 요새를 지나 필레문 위쪽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와 보카르 요새로 향해 가는 길


사람들의 기질 탓일까, 아니면 자연조건 때문일까. 굽어져 멀리 앞이 가로막히는 우리네 옛길들과 달리 이쪽 동네의 길과 건물들은 두부를 자른 듯 반듯합니다. 스트라둔과 시 종탑 간의 대로 외에도 건물들 사이로 많은 직선의 골목길들이 종으로 횡으로 시가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날은 이미 많이 개어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태까지는 해안이 아닌 산 쪽을 면해 둘러싼 성벽 위를 걸어왔지만, 여기 이 필레 게이트를 지나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바다에 면해 있는 성벽 위를 걷게 됩니다. 성벽에 뚫어진 구멍 틈으로 보이는 성내의 구시가지와 성 밖의 풍경들이 액자에 담긴 그림들처럼 아름답습니다. 우산을 걷고 한결 자유스러워진 몸짓으로 관광객들이 비 그친 스트라둔 위로 모여듭니다.





보카르 요새 위에는 정말 작동되었을까 미심쩍어 보이는 대포가 한 문 외로이 바다를 향해 있는데, 견고해 보이는 요새의 외벽과 달리 귀여운 장난감처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내전의 흔적인 듯한 폐허로 된 건물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일부러 방치를 빙자하여 보존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전을 겪었지만 오래전이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90년대 초에 내전을 겪었다면 그 악몽 같은 기억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선명히 각인되어 있을 겁니다. 많은 전쟁들로 점철된 중세의 흔적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현대에 그런 잔인한 전쟁과 살육이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일어났다는 게 실감이 되지 않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깎아지른 절벽이 천혜의 방벽이 되고 그 위로 더해진 인공의 성곽은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고한 성벽도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처음 성벽의 건축은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오늘날처럼 갖추어진 모습은 건축물이 대부분 지어진 15-16세기 때 완성되었습니다. 이때가 두브로브니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짧은 기간이었고 그 이전부터,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러 나라들로부터 지배와 통치를 받게 됩니다.

9세기부터 비잔틴의 보호를 받았고, 그 뒤로는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다가 또 헝가리의 지배를 받습니다. 잠시 황금기를 누리다가 나폴레옹이 등장하여 프랑스의 지배를 짧게 받다가 그 후 오스트리아에 병합됩니다. 두브로브니크는 세계 1차 또는 2차 대전에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1991년에 벌어진 전쟁으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또 한 번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성벽의 군데군데 얼룩진 피해의 흔적들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의해 만들어진 상흔들인지 규명하기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건 또 약소국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들춰내는 일이기도 할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수많은 침략을 이겨내 온 우리와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아드리아해.

무식하게도 베니스에서 곤돌라를 타면서도 그 바다가 지중해인 줄 알았지 베네치아 공화국의 내해 역할을 하던 아드리아 해인 줄 몰랐습니다.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아니, 올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작은놈이랑 유럽 배낭여행 중에 리스본에서 느꼈던 그런 감정이 느껴집니다.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그때도 바다 앞에서, 대서양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유럽인들은 외지인들이 보기에는 다 비슷해 보이지만 자기들은 출신국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도 중국 사람과 일본 사람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은 쉽게 구분합니다. 하지만 서구인들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고들 합니다.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그리고 내가 특히 감탄했던 리스본에도 붉은 주황색 지붕을 한 비슷비슷한 집들이 많았습니다만 여기 두브로브니크의 색은 그것들과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오늘 아침에 비를 맞으며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한 뜨내기의 눈으로는 정확히 구분은 못하겠지만 만약 내가 여기서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살 수 있다면 그 색들의 미묘한 차이를 감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일이면 여기 두브로브니크를 떠나야 합니다.





참고문헌 : 발칸 유럽 역사 산책, 이기성, 북랩

                  크로아티아 홀리데이, 양인선, 꿈의 지도

                  http://dubrovnikdigest.com/kr/history/the-war-in-dubrovnik 두브로브니크 가이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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