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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미역 Mar 03. 2018

두브로브니크의 스르지 언덕에서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3

비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고, 여기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비 때문에 바다에서 두브로브니크를 조망해 보는 유람선 투어는 취소되었고, 예약한 식당의 점심식사 시간은 맞추어야겠고, 난감하지만 차선책을 찾다 보니 스르지산에 먼저 오르는 것입니다. 케이블카를 타는 것보다는 차로 올라가면 전망 좋은 곳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볼 기회가 더 많다는 친절한 가이드의 권유로 우리는 그렇게 따르기로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짐작컨대는 유람선 투어가 취소됨으로써 시간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 케이블카에서 승합차로 바뀌었지 않나 생각하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플로체 문에서 본 올드 포트 전경 및 스르지 산으로 가는 승합차 안에서


스르지 언덕에 오르기 위해서는 플로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여태껏 내린 비보다 훨씬 더 세차게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스르지 산으로 우릴 태우고 갈 승합차를 기다리는 동안 및 차에 타면서, 내리면서 비를 많이 맞았습니다. 산을 오르내리며 기사와 우리들 승객은 한마디 대화도 없었습니다. 세우면 내리고, 올라타면 출발하는 단순한 루틴에 무슨 말이, 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내내 분위기는 어색했습니다. 서로가 언어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인가..... , 상대방은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나는 택시기사와 말 섞기가 귀찮아 주로 버스만 타고 다닙니다. 한국에서.



스르지 언덕에 오르다가 내려다 본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비가 줄기차게 내리지만 약속대로 전망대로 오르는 동안 두 번이나 다른 곳에 차를 세워서 시가지를 조망하게 해줬습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세찬비를 맞으며 차에서 내리기가 망설여집니다.  겨울에 유럽에 간 적이 두어 번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처럼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많이 내립니다.

전망대 안은 따뜻했고, 우리와 같은 처지의 먼저 온 관광객들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날씨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을뿐 전혀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데도, 친절한 가이드가 한잔 쏘겠답니다. 나는 커피를 마셨고 평소에 공짜를 좋아하지도, 저렇게 남들 앞에서 환하게 웃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 차를 한 잔 주문해 놓고 왜 저렇게 웃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차 한잔 얻어먹는 것 때문에 저러지는 않을 거고, 그 당시 내가 무슨 재밌는 말을 했었을까.



스르지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구시가지


아드리아해를 굽어보는 스르지 산 405m 정상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가히 일품입니다. 비가 내려 우중충한 날씨임에도 '아드리아해의 진주'로서의 위용은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비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차분하게 내려앉은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물론 햇볕 쨍한 맑은 날에 보는 맛도 좋겠지만 인적 드문 거리를 내려다보는 느낌은 뭔가 온 시가지를 전세 낸 기분입니다. 성벽 위를 걷는 사람도, 거리를 걷는 사람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유명한 관광지가 이런 날이 아니면 밤이건 낮이건 인적이 드문 날은 별로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 때문에 산만해지고, 집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입니다.



커다란 십자가는 내전 당시 스르지산 탈환에 힘쓰다 전사한 방위군의 비석. 이름없는 무명용사의 묘. 포탄을 맞은 흔적


스르지 언덕에도 내전의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1086년에 스르지 산 교회 부지 내에 구축되어 오스만 제국의 접근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 오던 요새는 그 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다가, 1991년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둘러싸인 두브로브니크의 방어를 위해  다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요새를 제외한 모든 크로아티아 지역이 점령을 당하였습니다.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군대에 의해 요새와 두브로브니크에 가장 큰 공격을 가한 것은 91년 12월 6일로 장기간의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지고 견디기 힘들 만큼 이 요새에서 버티고 또 버텼습니다.

당연히 요새는 막대한 피해를 받았지만, 두브로브니크를 방어하던 부대는 그나마 프랑스, 오스트리아 당시의 건축 기술 덕분에 비교적 피해가 덜 했습니다. 오늘날 이 요새는 두브로브니크 방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를 담고 있는 전쟁 기념 박물관으로 오픈되어 있습니다.

http://dubrovnikdigest.com/kr/history/the-war-in-dubrovnik 두브로브니크 가이드 참조.


전쟁 기념 박물관


발칸의 내전에 대해 조금 살펴보면,

- 티토가 죽은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의 6개 나라는 구심점을 잃고 각자 제 갈 길을 모색한다. 같은 남 슬라브족이지만 이들은 오래전부터 종교와 문화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달랐다. 이들 중에서 가톨릭을 신봉하며 상대적으로 경제 수준이 높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제일 먼저 연방 탈퇴와 함께 독립을 선포한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주축인 세르비아가 연방의 와해를 우려하여 이들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내전이 발발한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는 아드리아 해에 면한 크로아티아의 최남단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 포격을 감행했다. -


참고문헌 : 발칸 유럽 역사 산책, 이기성, 북랩



https://youtu.be/WE0pHt6L6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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