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 22일 #4
이번 여행의 일정을 짤 때 가장 고심을 많이 한 부분이 발칸에서의 첫날이었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터키와 불가리아의 국경 근처에 있는 에디른이라는 곳에서 일박을 하고 불가리아로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전 정보 수집 과정에서 대부분의 에디른 가는 버스는 이스탄불에서 출발하여 소피아, 심지어는 체코의 프라하까지 가는 버스들로 에디른은 중간 경유지에 불과하여, 도중에 버스가 승객을 내려 주는 곳이 에드린과 동떨어진 한적한 도로변이라는 둥, 초심자들이 야간에 내려서 시내까지 찾아가기는 힘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에디른에 낮에 들어가려면 이스탄불에서 하루를 묶어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일정 상의 문제가 있어서 에디른을 과감히 빼버리고 첫 행선지를 플로브디프로 잡았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하스코보에 먼저 가서 거기서 일박을 하고 플로브디프로 갈지 등을 놓고 무수한 고민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 플로브디프에서의 첫 일박이었습니다.
터키를 비롯하여 내가 다녀 본 대부분의 발칸 국가의 버스들은 국경을 넘는 장거리 버스의 운행 시스템과, 근교 시외를 다니는 시골 촌동네의 버스 시스템을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이었습니다. 장거리를 다니기 때문에 버스에는 교대로 운전을 할 보조 기사가 필수적으로 탑승하여 교대로 운전과 휴식을 취하고, 서로의 역할을 번갈아 가며 하고 있습니다. 한 기사가 운전을 할 땐 다른 기사는 승무원의 역할을 맡아 여권을 걷어서 국경 검문소에 제출하고 회수한다든가, 승객들의 버스표를 회수 확인하거나, 촌동네 버스시스템으로 운영할 때는 중간중간에 내리고 타는 승객들의 버스 요금을 즉석에서 정산하여 거스름돈도 내어주는 등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버스는 국가 간 국경을 넘지만 중간의 중요 도시에 정차할 뿐만 아니라 소도시에 접근할 때는 승객들의 요구에 따라 원하는 곳에 내려주는 시내버스의 역할도 나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탄 버스는 이스탄불에서 밤 11시에 출발하여 불가리아의 소피아까지 가는 버스로 중간에, 그러니까 새벽 6시 반에 플로브디프에 정차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
내가 탄 터키의 심야 메트로버스는 장거리 버스시스템만으로 운영되는 듯합니다. 버스에는 전문 여자 승무원이 타서 승객들에게 빵도 나눠주고, 차도 대접하고 있습니다. 나는 터키 차 차이를 한 잔 얻어 마셨습니다. 여권도 회수하여 뭔가를 확인하고 돌려줬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그때 무엇을 확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플로브디프에 가는 승객들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내가 자기네 말을 못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러면 최소한의 관심은 가져 줬어야 했을 텐데....
터키에서는 눈치껏 요령껏 움직이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는 느낌을 체류한 지 대 여섯 시간만에 받았습니다. 우리가 알아먹을 수 없는 자기네들 말로만 떠들기 때문에 우리가 타고 가야 할 버스가 도착했는지, 그리고 떠났는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순발력 떨어지고 눈치가 무딘 중늙은이들은 거의 치명적입니다.
근데 왜 왔을까. 첫날부터 이상한, 뭔가 쎄~한 느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이스탄불의 오토가르에서 밤 11시에 출발하여 새벽 2시 20분경에 터키 불가리아 국경에 도착하여 출국심사를 받습니다. 터키는 아직 EU에 가입을 못했고 불가리아는 EU 가입국입니다. 국경에 다가가면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됩니다. 심야에 터키에서 불가리아로 넘어가려고 국경 검문소를 향해 줄지어 선 트럭들의 끝없는 행렬입니다.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길게 늘어선 트럭들의 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10km도 넘을 듯합니다. 승용차와 버스가 다니는 일 차선은 심야 시간대라 그런지 텅 비어 있어서 버스는 쏜살같이 달리는데 기력을 상실한 채, 모든 걸 체념해 버린듯한 트럭과 그들 옆에 옹기종기 모여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운전기사들을 보니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통관과 검역 시스템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어느 세월에 저 트럭들이 국경을 넘을 수 있을는지 남의 일이지만 내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아마 뭔가 일시적으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무슨 검사를 어떻게 하는지 근 1시간이 지나도록 뭔가 진척되는 낌새가 안보입니다. 날이 따뜻해서 그렇지 만약 추운 날씨라면 차에서 내려서 오랫동안 대기한다면 그 또한 고역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외로 출국심사대에서는 얼굴만 한번 힐끗 보고 여권에 도장을 찍어서 돌려줍니다. 고작 이거 하려고 시간이 그리도 오래 걸렸나 생각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터키 출국심사를 마치고 200여 미터를 가니 또 차가 멈추고 터키 국기가 가슴에 새겨진 보안요원이 올라와서 다시 한번 여권 검사를 합니다. 그리고선 채 500미터를 안 가서 불가리아 입국심사를 하는데 여기는 의외로 깐깐합니다. 내 앞, 앞의 승객이 한참을 여자 심사관과 서로 묻고 질문하고, 그러고는 뭐가 또 미진한 지 승객과 심사관 사이의 창을 닫더니 그 여자는 어딘가로 한참을 통화를 합니다. 슬쩍 불안해집니다.
이윽고 내 차례. 어디로 가느냐? 불가리아, 근데 불가리아 입국심사하면서 불가리아 간다고 하니 뚱하니 쳐다봅니다. 아차 싶어서 플로브디프라고 하니 납득하는 듯, 무슨 목적으로? 여행, 며칠 있을 거냐? 이틀, 그다음엔? 마케도니아, 그리고도 한참 동안 여권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들쳐보다가 마지못한 듯 도장을 찍어줍니다. 영 내키지 않는 표정입니다. 저희 나라에 돈 쓰러 가는데 뭐가 저리 못마땅할까 싶어 불쾌한 감정이 쏟구칩니다. 어쨌든 누구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심사를 받는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새벽부터 말입니다.
아! 입국심사는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많이도 불쾌하구나. 앞으로 이걸 몇 번이나 더 해야 되지. 머리가 아픕니다.
내가 알기로는 최종 목적지가 소피아인 이 버스의 플라브디프 도착 예정시간은 6시 30분이었는데, 5시 반쯤에 어딘가에 도착했습니다. 느낌과 시간 상 플로브디프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걸 감지하며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었는데 버스 내에서는 인터넷이 안 터집니다. 그러니까 구글맵으로 실시간 위치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여기 불가리아는 키릴 문자(러시아어랑 비슷한)를 쓰기 때문에 알파벳에 익숙한 우리는 배려심이 없는 거리의 표지판이나 간판 등에 까막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미얀마에 갔을 때 숫자까지도 저들 말로 표기(예를 들면 36을 우리말로 삼십육이라고 표기하면 우리말을 모르는 외국인들이 모른다) 하는 것처럼.
모든 승객들이 정차한 틈을 타서 휴식을 위해 내리는데, 내 뒤의 누군가가 내리면서 여기가 플라브디프라고 알려줍니다. 그제야 눈치채고 나도 배낭을 메고 서둘러 따라 내렸습니다. 앞으로 버스를 더 타고 가야 할 승객들이 내려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한쪽 옆에 뚱뚱하고 성실해 보이지 않던 여승무원에게 여기가 플라브디프냐고 물으니 고개만 한번 가볍게 끄덕합니다. 물론 버스가 정차하기 전에 뭐라고 안내방송을 하긴 했지만 내 귀에는 플라브디프의 '플'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어두운 내 귀탓도 있겠지만. 까딱 잘못했으면 소피아까지 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제 역할이 뭔지도 모르는 참으로 나이브한 여승무원입니다.
버스에서 내려서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예습한 바 대로 버스는 기차역 맞은편 버스정류장에 나를 내려줬다기보다는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정차했습니다. 6시도 안된 시간이라 아직 캄캄한데도 기차역사의 불빛 때문에 역은 쉽게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먹통이던 인터넷이 버스에서 내린 그 순간에는 잘 터져줬던 탓도 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역에 빨리 가야 한다는 쓸데없는 조바심 때문에 날 도와준 고마운 청년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도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려 그 후, 낯설고 어두운 거리를 헤메 다니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역에 가려는 이유는 내일 소피아 가는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간 인터넷을 통해 아무리 애를 쓰도 예매는 불가능했습니다. 불가리아 철도청 홈페이지도 인터넷으로 티켓 예매를 하지만 아직까지는 시범 서비스라서 심야시간대의 일부 기차표만 예매가 가능한 실정이었습니다. 기차 말고 소피아 가는 버스도 있지만 하루에 몇 편이 없고, 그나마도 첫 차가 오후 4시 출발이라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역의 매표창구로 가서 미리 적어간 쪽지(내일 오전 8시 10분, 2등석 1장)를 내밀었더니, 창구 건너편으로부터 "투말로!"라는 답변이 날아옵니다. "예?" 하고 몇 번을 물어도 반복해서 투말로랍니다. 그러니까 내일 표는 지금 안 파니까 내일 와서 끊어라는 얘기입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방금 전에 싸우다 나온 사람처럼 노기가 드센, 내 나이 정도 되는 늙은 아주머니. 새벽부터 등줄기가 서늘하니 무섭습니다. 어이가 없지만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지.
- 그러니 비슷한 경험을 한 기억이 납니다. 2007년 둘째 놈 준원이랑 배낭 메고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에 내려서 인포메이션에 들렀을 때, 지금 역무원과 비슷한 연령대의 할머니가 내가 찾아가는 호텔로 가기 위해서는 몇 번 버스를 타야 되는지 물어보자 다짜고짜로 한마디 했습니다. "택시!" 딱 한마디만 했습니다. 그때 그녀도 화난 사람처럼 보였고, 역시나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만큼 무서웠습니다. -
그냥 돌아서려니까 억울하기도 해서 혹시나 싶어 역사 입구 쪽에 있는 인포메이션 창구에다 대고 물었습니다. '혹시 내일 표를 지금 예매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제복 차림이 아닌 그 역무원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매표창구에 다시 가서 얘기해 보란다. 예매할 수 있다고. 거기서 안된다고 그런다니까 자기도 모르겠단다. 여기는 자기네 화폐인 레브만 사용한다고 들어서, 그럼 유로화로 기차표는 살 수 있냐니까, 어깨를 들썩이며 웃으면서 모르겠단다. 화가 나는 걸 애써 억누르며 속으로 '그럼 넌 왜 거기에 나와 앉아 있냐. 이 꼭두새벽에, 집에서 잠이나 자지' 돌아서면서 나직이 중얼거렸습니다. 근데 아직도 궁금합니다. 그 인포 창구의 웃는 얼굴의 역무원이 남자인지, 여자였는지. 한 60%는 남자 같기도 했는데.
'투말로' 할머니한테는 다시 찾아갈 마음도 안 나고 해서 할 수없이 역을 나와 버렸습니다. 새벽의 입국 심사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더니 불가리아의 첫인상 완전 꽝입니다.
호텔 체크인은 오후 두 시부터라는데 지금 시각 오전 5시 50분 아직 사위는 캄캄합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볼거리를 찿아다녀야지. 근데 어쩌나, 인터넷이 또 안 터집니다. 찾아볼 곳, 호텔 등 거의 모든 것을 구글맵에 찍어뒀는데.막 동이 트려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고,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그때부터 불가리아 제2의 도시 플르브디프에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 나중의 일이지만 11시 30분경에 찾아간 호텔은 두 시가 되기 전에는 체크인이 안된다고 해서, 다시 돌아서 나와 지친 몸을 이끌고 무더운 거리를 헤매다 시간 보내려고 알로샤 동상이 있는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었고, 두 시가 넘어 찾아간 호텔방은 최악이었습니다.
아! 불가리아. -